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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움278

불길에야 녹을 눈 김소월의 ‘눈’을 읽는다 ....................................... 새하얀 흰 눈, 가비얍게 밟을 눈, 재 같아서 날릴 듯 꺼질 듯한 눈, 바람엔 흩어져도 불길에야 녹을 눈, 계집의 마음, 님의 마음. ...................................... 소년은 눈을 보며 그 소녀를 생각한다 그 소녀는 하얗다 새하얗다 게다가 또 희다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얼룩이 질 것 같다 누군가 아주 가볍게 밟아도 꿈틀 못하고 밟힐 것 같다 재처럼 너무나 미미하여 한 줌 바람에도 흩어져 없어질 것 같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마는 듯한 불씨는 다 날리기 전에 꺼질 듯하다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먼저 흩어질 그 소녀 그 소녀를 생각하는 소년의 마음은 불길 같아서 그 불길.. 2023. 12. 18.
바르게 살기 바르게 앉아라. 똑 바로 서라. 글씨를 바르게 써라. 바른 말을 써라. 바른 생활을 해라. 대체로 어릴 때 많이 들었던 말들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바른생활’이 있다. 바르게살기협의회도 있고 바르게살기 운동도 한다. ‘바른’ 것은 중요한 모양이다. ‘바른’ 것은 주로 어릴 때 습관처럼 형성시켜야 할 태도나 가치관인 모양이다. 바른 것은 가지런함과도 통한다. 식물의 싹이 땅가죽을 힘겹게 막 뚫고 나왔을 때는 구부러진 것들이 많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하루 이틀 사이에 금방 가지런하게 자리잡는다. 다른 장애물이 없다면 바르고 곧은 자세를 잡은 뒤에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한다. 식물도 초기에 바른 자리에 바른 모양이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사람도 어릴 때는 흔들리면서 바른 자세를 잡아간다. 흔들.. 2023. 12. 17.
반복 다니카와 슌타로의 ‘반복’을 읽는다. 반복해서 이렇게도 반복 반복해서, 이렇게 이렇게 반복 반복 반복해서, 반복 반복 연이어 이렇게도 반복해서 반복, 몇 번인가 반복하면 되는가 반복하는 말은 죽고 반복하는 것만이 반복 남는 반복, 이 반복의 반복을 반복할 때마다, 해는 뜨고 해는 지고 그 반복에 반복하는 나날, 반복 밥을 짓고 반복해서 맞이하는 아침의 반복에 어느덧 밤이 오는 이 반복이여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안녕이라고! 이별의 행복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우리들은 반복한다 다른 것은 없다 반복 반복해서 꿈꾸며 반복해서 만나서 껴안고 반복해서 흘리는 군침이여 이제 만날 수 없을 반복 언제까지나 만나는 반복 만나지 못하는 반복의 나무 나무에 바람은 불고 오늘 반복하는 우리들의 끊임없는 기침과 냄비에 물 긷는.. 2023. 12. 16.
크고 장성하다면 뢰천대장(雷天大壯䷡) 사람들은 대체로 큰 것을 더 좋아한다. 과일도 곡식도 가축도 큰 것이 더 상품(上品)이다. 크다고 좋은 것만이 아니고, 작은 것은 더 좋을 경우도 많은데 사람들은 더 큰 것을 추구한다. 큰 것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계속 확장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사과나 배가 큰 것이 좋다고 한 알이 축구장 만해도 좋아하겠는가. 사람도 키 큰 사람을 좋기로서니 3미터 넘는 장신을 좋아하겠는가. 큰 것을 좋아하게 된 연유(緣由)는 알겠다. 똑 같은 품종이고 거의 똑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큰 것이 생장이 탈이 없었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영양가든 맛이든 큰 것이 더 우월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괜히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말이 나온 게 아닐 것이다. 또 아름다움 미(美)에.. 2023.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