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카와 슌타로4 메마른 눈물 울어야 할 일에 안 울다 보니 웃어야 할 일에도 웃지 못한다 미안해야 할 일에 미안하다 않으니 화내야 할 일에 화내지 못한다 웃음에 겨워 울어본 적이 언제든가 기쁨에 겨워 울어본 적이 언제든가 미움에 겨워 울어본 적이 언제든가 분노에 겨워 울어본 적이 언제든가 욕망에 겨워 울어본 적이 언제든가 슬픔에 겨워 울어본 적이 언제든가 오늘도 어이 없는 분노와 격노에 헛웃음만 나와, 그 분노에 분노가 겨워 눈물 없이 눈시울만 적신다 2023. 12. 27. 바르게 살기 바르게 앉아라. 똑 바로 서라. 글씨를 바르게 써라. 바른 말을 써라. 바른 생활을 해라. 대체로 어릴 때 많이 들었던 말들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바른생활’이 있다. 바르게살기협의회도 있고 바르게살기 운동도 한다. ‘바른’ 것은 중요한 모양이다. ‘바른’ 것은 주로 어릴 때 습관처럼 형성시켜야 할 태도나 가치관인 모양이다. 바른 것은 가지런함과도 통한다. 식물의 싹이 땅가죽을 힘겹게 막 뚫고 나왔을 때는 구부러진 것들이 많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하루 이틀 사이에 금방 가지런하게 자리잡는다. 다른 장애물이 없다면 바르고 곧은 자세를 잡은 뒤에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한다. 식물도 초기에 바른 자리에 바른 모양이 중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사람도 어릴 때는 흔들리면서 바른 자세를 잡아간다. 흔들.. 2023. 12. 17. 반복 다니카와 슌타로의 ‘반복’을 읽는다. 반복해서 이렇게도 반복 반복해서, 이렇게 이렇게 반복 반복 반복해서, 반복 반복 연이어 이렇게도 반복해서 반복, 몇 번인가 반복하면 되는가 반복하는 말은 죽고 반복하는 것만이 반복 남는 반복, 이 반복의 반복을 반복할 때마다, 해는 뜨고 해는 지고 그 반복에 반복하는 나날, 반복 밥을 짓고 반복해서 맞이하는 아침의 반복에 어느덧 밤이 오는 이 반복이여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안녕이라고! 이별의 행복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우리들은 반복한다 다른 것은 없다 반복 반복해서 꿈꾸며 반복해서 만나서 껴안고 반복해서 흘리는 군침이여 이제 만날 수 없을 반복 언제까지나 만나는 반복 만나지 못하는 반복의 나무 나무에 바람은 불고 오늘 반복하는 우리들의 끊임없는 기침과 냄비에 물 긷는.. 2023. 12. 16. 여기 다니카와 슌타로의 「여기」라는 시를 읽는다. 어딘가 가자고 내가 말한다 어디 갈까 하고 당신이 말한다 여기도 좋을까 하고 내가 말한다 여기라도 좋네 하고 당신이 말한다 얘기하는 동안 해가 지고 여기가 어딘가가 되어간다 ----------------------------- 그때는 다들 어딘가로 떠났다 면소재지로, 읍내로, 대구로, 부산으로, 서울로 어디쯤 가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디가 좋은지도 모르고 그곳은 당연히 떠나야 하는 곳인줄만 알았다 여기가 좋아서 오래 산 것이 아니다 살다보니 여기도 살만한 곳이 되었다 얘기하고 사는 동안 어느덧 마흔 해가 지나 찾아떠난 어딘가는 여기가 되어 있다 같이 얘기하고 지내던 애들은 어디가 좋을까 생각도 없이 다시 조금씩 더 멀리 어딘가로 떠났다 2023. 11. 19.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