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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그제도 비 어제도 오늘도 비 월요일 비 화요일 비 수요일도 비 비가 오면 비가 오면 이렇게 줄창 맑은 날 설렘의 입자로 모락모락 타올랐던 스치는 바람에 바램의 파장으로 몽글몽글 피어올랐던 빽빽한 그리움의 분말들이 엉겨붙어 제 몸 무게 못이겨 쏟아져 내린다 비가 오면 비가 오면 삼일이나 비가 오면 빗소리 불어난 물소리 그대 목소리 운무 속에 뿌옇게 떠올랐다 사라지는 그대 얼굴 콸콸거리며 부딪쳐 깨지며 빛나는 계곡물 낯빛과 함께 속절없이 떠내려간다 속절없이 2024. 2. 21.
시(詩)도 비처럼 바람 부는 날 흩어졌던 생각들이 햇빛 더운 날 증발했던 감정들이 계단 오르며 떠올랐다 휘발했던 발상들이 먼 하늘 바라보다 아직도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헤어지고 순간 순간 스쳐지나갔던 생각들이 불현 듯 왔다가 사라졌던 느낌들이 바람을 타고 엉기고 맺혀 더 이상 못 견뎌 쏟아져 내리면 시(詩)도 비처럼 어느 순간 방울방울 떨어지다 빗줄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을 흠뻑 적시면 2023. 9. 20.
비를 맞다가 신(神)을 만나다 아침에 수영장에 갈 때는 비가 안 왔다. 밀운불우(密雲不雨)의 상태였다고나 할까. 밀운불우(密雲不雨). 빽빽한 구름이 끼여 있으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일의 징조(徵兆)만 있고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은덕(恩德)이 아래까지 고루 미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주역 풍천소축괘에 나오는 말이다. 수영을 다 하고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비를 맞으며 걸었다. 큰 나무가 있으면 나무 밑으로 걸었다. 벌 두어 마리가 댕강나무 꽃잎 사이로 날았다. 비가 안 올 때 나왔다가 미처 못 들어갔는지, 비가 오는 걸 무릅쓰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비를 맞았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비를 맞는 일이 많았다. 우산이 귀하기도 했고, 갑자기 오는 소나기는 피하기 .. 2023. 8. 18.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사월 중순 아침이다. 엊저녁에 비가 내린 모양이다. 울산에서 언양으로 가며 길가의 나무들을 본다. 비로 젖은 물기가 마르지 않아 검은 윤기가 난다. 비가 갠 아침이라 풀과 나무들이 아주 맑고 싱싱하다. 높지도 않은 산 허리에 흰 구름이 목욕 가운처럼 걸쳐 있다. 이제 막 태양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빛줄기들이 나뭇잎에 배어있는 빗물을 하얀 증기로 날려올린다. 구름같은 안개같은 하얀 기운이 산등성이로 꿈틀거리며 날아오른다. 옛날엔 오월의 신록(新綠)을 예찬했다. 야산(野山)과 높은 산 중턱까지 새잎들이 나와 온산을 담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아까시나무, 벽오동도 잎을 내밀고 있다. 오동(梧桐)과 등(藤)나무도 자줏빛 꽃을 피우고 있다. 비 갠 아침, 물기가 채 덜 말라 싱싱한 담초록의 나무와 숲은 말할 수 없.. 2023.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