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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파동167

무일(無逸) 어느 따뜻한 겨울날이었다. 내촌 양반이 집에 없는 날이어서 여유가 생긴 아들이 앨범에서 오래된 사진을 처음 보고 부엌에 있는 내촌댁한테 물었다. “어무이, 엄청나게 잘 생긴 이 군인 아저씨는 누구야?” “야가 무신 소리하고 있노? 너거 아부지 아이가.” 내촌 양반은 이런 날에는 동네 남정네들하고 복령을 캐러 갔다. 같은 마을에는 복령을 캐러 다니는 꾼들이 대여섯 명 있었다. 우선 땅 속에 있는 복령을 탐지할 수 있는 쇠꼬챙이가 필요하다. 양손으로 잡고 땅을 찌르기에 알맞은 티(T) 자형 나무를 다듬어 쇠꼬챙이를 박고 단단하게 고정을 시킨다. 쇠꼬챙이의 끝은 송곳처럼 예리하게 다듬는다. 길고 짧은 쇠꼬챙이를 보통 서너 개씩은 가져다닌다. 쇠꼬챙이가 부러질 때도 있고 지형(地形)에 따라 쓰임이 다르기도 하기.. 2023. 4. 3.
벚꽃 엔딩 어릴 때 내가 살던 고향에는 이맘때 쯤이면 복숭아꽃 살구꽃이 석양 속에 피어 있었다. 얕은 산에는 진달래꽃이 불타오르는 듯이 온산을 덮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다.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지붕들은 슬레이트나 양철 지붕으로 바뀌었다. 멀쩡한 기와지붕마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새마을 진행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마을 입구에 시멘트로 만든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 표지가 세워졌다. 아마 이때부터였으리라. 마을 어귀나 집과 집 사이, 개울가에 있던 복숭아나무 살구나무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돈 안 되는 감나무도 베어져 목재로 팔렸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러 이제 어딜 가나 벚꽃 천지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과수원에만 열을 맞춰 멋없게 피어 있다. 벚꽃은 일본 사람.. 2023. 4. 2.
봄나물 봄나물 텃밭에 갔다. 나물을 좀 뜯었다. 냉이는 흰꽃들이 많이 피었다. 꽃이 피지 않은 것들도 나물로 먹기엔 이제 질기다. 달래도 몇 뿌리 캤다. 얼마 되지 않아 달래장을 만들어야겠다. 쑥도 이제 제법 쑥 올라왔다. 쑥국이나 된장국에 넣기엔 너무 커버렸다. 쑥버무리로 해먹는 게 좋겠다. 쑥떡을 하려면 양이 많아야 되기 때문에 낫으로 슥슥 벨 정도로 좀 무성해야 한다. 미나리도 좀 뜯었다. 야생 미나리라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길이는 짧지만 향이 진하고 맛은 더 있다.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전을 부쳐 먹어도 맛있다. 머위가 나물로 먹기에 적당하게 컸다. 머위순이 어릴 때는 뿌리 가까이까지 잘라야 머위 향이 진하다. 너무 오래 데치지 않아야 식감도 쫄깃하고 향도 살아있다. 머위 나물은 초장이나 된장에 무치면 .. 2023. 3. 31.
머리카락 머리카락 70년대 말에 중학교를 다녔다. 면소재지에 중학교가 있었고 우리 집은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넘게 산골짜기로 들어가야 했다. 비포장 도로였고 버스는 하루에 두세 번 있었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애들이 많았지만, 등하교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고 그 시간이 아까울 때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기도 했다. 비나 눈이 올 때는 불편했다. 도로에 제법 굵은 자갈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며 자갈을 피하려다 논바닥으로 굴러 쳐박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면소재지에 있는 동네, 특히 학교 옆 동네에서 자취하는 애들이 많았다. 선생님들도 대부분 처녀 총각이었는데,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방은 학생들의 자취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시험을 치고 나면 한 번씩 불려가 채점을 해주고 따뜻한 .. 2023.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