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無逸)>
어느 따뜻한 겨울날이었다.
내촌 양반이 집에 없는 날이어서 여유가 생긴 아들이 앨범에서 오래된 사진을 처음 보고 부엌에 있는 내촌댁한테 물었다.
“어무이, 엄청나게 잘 생긴 이 군인 아저씨는 누구야?”
“야가 무신 소리하고 있노? 너거 아부지 아이가.”
내촌 양반은 이런 날에는 동네 남정네들하고 복령을 캐러 갔다. 같은 마을에는 복령을 캐러 다니는 꾼들이 대여섯 명 있었다. 우선 땅 속에 있는 복령을 탐지할 수 있는 쇠꼬챙이가 필요하다. 양손으로 잡고 땅을 찌르기에 알맞은 티(T) 자형 나무를 다듬어 쇠꼬챙이를 박고 단단하게 고정을 시킨다. 쇠꼬챙이의 끝은 송곳처럼 예리하게 다듬는다. 길고 짧은 쇠꼬챙이를 보통 서너 개씩은 가져다닌다. 쇠꼬챙이가 부러질 때도 있고 지형(地形)에 따라 쓰임이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때쯤 돌아오기 때문에 군인 반합에 점심을 싸간다. 군인 반합은 요즘도 야외 캠핑이나 백패킹에 쓰는 사람들이 있기에 2~3만원 대에 구입할 수 있다. 짚으로 새끼를 꼬아 만든 망태기에 도시락과 괭이 한 자루를 넣고, 쇠꼬챙이는 뾰족한 부분이 바깥으로 삐져 나오도록 꽂는다.
경험과 솜씨에 따라 복령을 캐는 양도 각자 다르기도 하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 어떤 날은 하나도 못 캐는 날이 있고, 재수가 좋은 날에는 열 몇 근씩 캐기도 했다. 별다른 돈벌이가 없는 겨울철에 복령 수입은 쏠쏠할 때가 많았다.
농촌의 겨울은 할 일이 별로 없다. 농한기(農閑期)라고 한다. 내촌 양반은 겨울에도 한가롭게 보내지 않았다. 복령을 캐러 가지 않는 날에도 놀거나 쉬는 일이 없었다. 날이 좋을 때는 땔나무를 하러 갔다. 날이 안 좋은 날에는 농사철에 쓸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짰다. 지게를 만들고 싸리나무로 소쿠리를 만들었다. 바가지나 주걱 등 나무로 된 가사 도구나 쟁기ㆍ써레ㆍ가래 등의 농기구를 만들거나 수리했다.
내촌댁은 결혼할 때가 생각났다. 열여덟 살이었다. 내촌댁도 그 마을에서도 한 인물하고 솜씨나 욕심도 남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내촌 양반이 갓을 쓰고 혼례식장에 들어서는 모습은 옥골선풍(玉骨仙風)이었다. 장모인 내촌댁의 어머니도 흐뭇한 미소가 가실 줄 몰랐고,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도 떠들썩했다. 그후로도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내촌양반은 얼굴에 반은 코가 차지했다. 유난히 큰 코가 산맥처럼 우뚝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지금도 정장 차림을 하고 나가면 동네 사람들은 서양 신사 같다고 말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하면 수트빨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촌댁은 스스로 남편 자랑을 한 적이 없지만, 생각할 때마다 속으로 은근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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