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수지비괘(水地比卦䷇) 물이 심지를 빼고 땅으로 스며든다면
比, 吉. 原筮元永貞, 无咎. 不寧方來, 後夫凶.
비는 길하다. 다시(처음) 점쳐서 원ㆍ영ㆍ정하여야 허물이 없다. 따르지 않던 제후가 바야흐로 오니(편하지 못하여야 바야흐로 오니) 뒤에 오는 자는 (대장부라도) 흉할 것이다.
初六, 有孚, 比之, 无咎. 有孚, 盈缶, 終來有它吉.
초육, 믿음과 진실함을 가지고 친해야(도와야) 허물이 없다. 진실함을 가지는 것이 질그릇에 가득 차듯이 하면 끝내는 다른 (데서) 길함이 있을 것이다.(오리라.)
六二, 比之自內, 貞吉.
육이, 안으로 친하니(돕는 것을 안으로부터 하니)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다.
六三, 比之匪人.
육삼, 친하나(돕는데) 바른 사람이 아니다.
六四, 外比之, 貞吉.
육사, 밖으로 친함이니(도우니)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다.
九五, 顯比, 王用三驅失前禽, 邑人不誡, 吉.
구오는 친애함을 드러내니(나타나게 돕는 것이니) 왕이 삼면에서 몰아감에 앞에 있는 짐승을 놓아주고 읍인도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
上六, 比之无首, 凶.
상육, 친함에 처음이 좋지 않으니(돕는데 머리가 없으니) 흉하다.
비괘는 길(吉)하다. 괘의 모습도 위에 감괘 물이 있고, 아래에 곤괘 땅이 있다. 물은 땅에 스며들거나 땅을 바탕으로 흐르고, 땅은 물의 기운을 받아 온갖 생물이 생성하는 토대가 된다. 비(比)의 의미도 ‘친함’, ‘도움’, ‘가까움’으로 좋다. 하지만 인간사에 백퍼센트 좋기만 한 것은 없다. 친함이나 도움은 무리나 상대가 있다. 어떻게 해야 서로 친함에 허물이 없을까.
가까움과 도움은 친함의 조건이다. 가까이 하지 않는데, 돕지 않는데 친하기는 어렵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친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가까이 있어 자주 만나며 물질적인 도움을 주든 만나주고 말을 들어주어 심리적 위안을 주든, 서로 도우면서 친밀해졌음을 알게 된다. 친할 수 있는 또다른 조건은 나란함이다. 위치가 대등해야 한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로 내려와 같이 견줄 수 있어야 한다. 위에 있는 물이 아래 있는 흙으로 내려와 스며들고 흘러야 한다. 물이 흙에 스며들려면 심지, 즉 상급자로서의 고집이나 권위의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마치 감괘(☵)의 중간 효를 터버리면 곤괘(☷)가 되는 것과 같다. 또 흙에 스며들었다가 흙의 기운을 모아 냇물을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에 이르면서 대동단결할 때는 심지를 갖고 물‘줄기’를 이루는 것과 같다.
거북점과 시초점을 같이 쳐서 하늘의 뜻 즉 천도(天道)에 따르되 원(元), 영(永), 정(貞)하여야 허물이 없다. ‘원(元)’은 군장(君長)의 도(道), 선(善)함, 보편적 가치를 뜻한다. 영(永)은 영원함, 정(貞)은 바름의 뜻이다. 나라든 단체든 그것을 새롭게 만들고 조직하려는 지도자는 보편적 가치, 선함, 새롭게 생성해가려는 의지, 바르고 견고해질 때까지 지속해가려는 영원함의 도리를 지키며 자신을 따르는 아랫사람을 돕고 친하게 하려고 해야 한다. 지도자, 윗사람은 그렇게 하기 위해 안녕하지 못하고 더 불편한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면 아랫사람들이 순종하고 따른다. 이런 상황이라면 능력이 있는 대장부라도 미적거리다가 늦게 합류하면 흉할 것이다. 새롭게 나라를 세우거나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에 잇속을 따지며 눈치를 보다가 늦게 오는 자는 비록 능력이 있는 자라도 단칼에 베어버리거나 내쳐야 한다. 그래야 모여서 협력하는 사람들의 기율(紀律)이 바로 선다.
‘원(元)’은 도덕경 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와 통한다. 선(善)은 잘하는 것이다. 가장 잘하는 것은 끊어진 생명을 소생시켜 싹을 틔우는 봄의 기운이다. 이 기운은 물과 같다. 물은 자신의 속성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것들의 속성을 무시하거나 힘으로 망가뜨리지 않는다. 물은 땅ㆍ풀ㆍ나무ㆍ돌, 쇠붙이 등에 스며들어 자신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그들을 생장시키거나 변화시킨다. ‘원(元)’의 기운은 여름 형(亨), 가을 리(利), 겨울 정(貞)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순환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게 하는 기운이 ‘영(永)’이다. 46억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서로 친하고 돕는 것은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친함의 대상과 범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논어』에 ‘君子(군자) 周而不比(주이불비) 小人(소인) 比而不周(비이불주)’라는 말이 나온다. 군자는 두루 친하고 자기편끼리만 패거리를 만들지 않으며, 소인은 자기편끼리만 친하고 두루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와 비슷하다. 비괘의 소상전에도 나라를 세우는 왕은 제후와 친해야 한다고 나온다. 물론 물리적으로 왕이 온 백성과 친할 수 없다. 사람이 물리적으로 가까이에서 돕고 친할 수 있는 대상은 한계가 있다. 현실적으로 왕이면서 제후와도 친해보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대통령이 시ㆍ도지사나 각부 장관만이라도 가까이 하고 서로 돕고 친해도 보통 이상의 나라는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 정도가 바람직할 수도 있다.
좀더 바란다면, 일 년에 한 달 정도만 고위 지도층이 서민의 생활을 직접 겪어보고, 그 임금(賃金)으로 그 생활해보는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맹자』에 보면 직접 목격한 것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면 왕노릇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만나러 갔는데, 그때 마침 한 신하가 종(鐘)을 제작할 때 제물로 바치기 위해 끌고 가는 소를 왕이 보게 된다. 그 소는 벌벌 떨고 있었는데, 선왕이 차마 못 보겠다며 살려 주라고 말한다. 그러자 신하가 그러면 그 제사 의식을 그만두라는 것이냐고 반문하자,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서민의 생활을 전혀 보지 않는 지도자도 있고, 마지 못해 보더라도 희한하게 연민이나 공감이 전혀 없는 지도자가 있다. 사실 이런 사람이 지도자로 선출되는 게 더 희한하긴 하다.
손자와 오기가 생각난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란히 나온다. 손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오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손자(손무)는 왕 앞에서 왕이 총애하는 궁녀들을 병사로 대신하여 장수로서 수행평가를 본다. 손자는 전쟁 상황에서 명령 전달의 중요함을 몇 번 설명하고 강조한다. 궁녀들은 짝다리 짚고 피식거리며 듣지 않는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바로 부대장급을 맡은 궁녀의 목을 쳐버린다. 궁녀들은 벌벌 떨면서 칼같이 명령에 복종한다. 그런데 오기는 병사들을 가까이 하고 도우며 친한 장수로서는 끝판왕이다. 말단 병사와 똑같이 배낭을 메고 행군하며 숙식을 한다. 병사의 종기(腫氣)를 직접 칼로 째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서 치료해준다. 병사들은 감동에 겨워 순종하고 죽기살기로 싸워서 오기가 이끄는 군대는 필승하게 된다. 요즘 지도자들은 손자와 오기 중에 누구를 더 닮으려고 할까.
동장이든 시장이든 장관이든, 어떤 공동체의 장(長)을 맡으면 물리적 공간의 크기로 지위와 권위를 내보이려 한다. 교장이 되면 갑자기 교실 한 칸의 공간을 차지하고 일반교사ㆍ학생들과는 거리를 둔다. 그 공간과 거리만큼 가까이 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지 않고 돕지(?) 않는다. 교장뿐만 아니라, 구청장이나 국회의원 모든 기관장과 높은 직급자의 집무 공간이 그렇다. 이들을 그것을 알고 있을까. 물리적인 공간과 거리가 갖는 현실적의 권위와의 상관 관계를. 대부분 자신은 안 그렇다고 하면서도, 바꾸지 않고 그 시스템에 순응한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어디서 들은 말을 같은데, 뭐라고 언급하고 싶지 않다.
호세 무히카는 우루과이 46대 대통령이다. 대통령궁은 사무실로만 사용하고 노숙자들의 쉼터로 내 줬다. 부인 소유의 허름한 농장 집에서 지내며 신고한 재산은 낡은 자동차 한 대뿐이었다. 당선될 때보다 임기 말에 지지율이 더 높았다.
점을 쳐서 비괘(比卦䷇)가 나왔는데 변효가 없다면, 비괘의 움직임을 봐야 한다. 비괘(比卦䷇)가 말려서 뒤집히면[종괘(綜卦), 도전괘(倒顚卦)] 지수사괘(地水師卦䷆)가 된다. 또 소성괘의 상하가 바뀌어도[역위생괘(易位生卦)] 지수사괘가 된다. 사괘는 군대, 장인(丈人)의 괘다. 무리의 기율(紀律)을 세우고 잘 훈련시키고 통제하여 전쟁을 치러야 한다. 수지비괘는 전쟁 후에 무리를 모아 서로 돕고 친하게 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워야 하는 상황에서 취해야 할 방도다. 왕이 친하기를 모범적으로 잘하고 그에 따라 백성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오(九五)인 임금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전쟁 후의 폐허와 혼란에 빠져 여전히 지수사괘처럼 제후급의 장인 즉 전문가가 모든 험난함을 극복해야 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수지비괘에서 음양이 바뀌면[배합괘配合卦)] 화천대유괘(火天大有卦䷍)가 된다. 수지비괘는 강건한 지도자(구오, 군주)가 만 백성을 도와서 친하고 이에 만 백성도 지도자를 순종하여 길(吉)하다. 화천대유괘는 지도자(육오, 군주)는 유순한데, 따르는 제후와 백성들이 모두 강건해서 크게 소유(공유)하는 풍요로운 괘다.
수지비괘(水地比卦䷇)의 겉효를 떼고 속효(2,3,4/3,4,5)로 재구성한 호괘(互卦)는 산지박괘(山地剝卦䷖)다. 음이 더 자라고 양이 깎인 모습이다. 산이 땅에 붙어 군자(구오)가 이를 본받아 아래를 두텁게 해야 집안이 편안한 상이다. 수지비괘의 상황에서 양이 소(消)하고[쇠하고], 허(虛)하는[비는 상황] 산지박괘로 변하면 피하지도 말고 대항하지도 않으면서 뜻을 펼 때를 기다려야 한다.
“초육, 믿음과 진실함을 가지고 친해야(도와야) 허물이 없다. 진실함을 가지는 것이 질그릇에 가득 차듯이 하면 끝내는 다른 (데서) 길함이 있을 것이다.(오리라.)”
초육은 시작하는 때이고 가장 낮은 자리이다. 이런 조건에서 나라나 단체를 새롭게 세우는 무리에 합류해서 도우면서 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믿음과 진실함이 질그릇 장군에 가득 차듯이 하면 군주나 단체의 지도자(구오)로부터 길함이 온다.
초육이 움직여 변효가 되면 수뢰둔괘(水雷屯卦䷂)가 된다. 둔(屯)은 양과 음이 처음 사귀는 것이고, 험난한 가운데 새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곤괘(☷)의 순함ㆍ따름이 여전히 있으면서 뢰괘(☳)의 움직임이 생긴다. 충만한 믿음과 진실함으로 돕고 친하도록 하되, 좀더 역동적으로 움직여도 좋다.
“육이, 안으로 친하니(돕는 것을 안으로부터 하니)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다.”
육이는 처음은 벗어났지만 아직 기다려야 하는 때다. 하괘의 중(中)으로 상괘의 중(中)인 구오(九五)와 응하는 자리이다. 먼저 구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구오(군주ㆍ지도자)가 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스스로를 잃지 않고 안으로부터 도우며 등용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육이가 움직여 변효가 되면 중수감괘(重水坎卦䷜)가 된다. 아래 위로 험난한 상태가 되고 내호괘로 뢰괘(☳)의 움직임ㆍ흔들림이 있고, 외호괘로 간괘(☶)의 그침이 있다. 함부로 움직이면 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니 때를 기다려야 한다.
“육삼, 친하나(돕는데) 바른 사람이 아니다.” 돕고 친하기는 해야 하나, 위로도 아래로도 바른 사람을 얻을 수 없는 때다. 중(中)하지도 정(正)하지도 않은 자리다.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육삼이 움직여 변효가 되면 수산건괘(水山蹇卦䷦)가 된다. 건괘는 절름발이, 곤경을 뜻한다. 감괘(☵)가 겹치고, 내괘로 간괘(☶), 외호괘로 리괘(☲)가 생겼다. 감ㆍ간ㆍ리괘를 좋은 쪽으로 보기 힘들다. 상황이 더 험해져 그쳐 있어야 된다. 함부로 움직이면 불이나 병기구 같은 것에 절름발이처럼 상처를 입거나 곤경에 처하게 된다.
“육사, 밖으로 친함이니(도우니)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다.”
육사는 움직여야 하는 때이다. 이 자리는 대신(장관) 자리로 정(正)하며, 초육과는 무응(无應)하지만 구오와 상비(相比)를 이룬다. 멀리 있는 초육을 돕거나 친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군주(구오)를 돕고 따라야 길하다.
육사가 움직여 변효가 되면 택지췌괘(澤地萃괘䷬)가 된다. 췌괘는 ‘모음, 수집’이다. 간괘(☶)가 남아 있지만 감괘(☵)가 택괘(☱)가 되고 외호괘로 손괘(☴)가 생기고 아래 지괘(☷)는 그대로 있다. 기뻐하면서 겸손하게 위를 돕는 상이다. 또는 윗사람끼리는 서로 화합하여 기뻐하고, 아랫사람끼리는 유순하게 따르며 돕는 상이다.
“구오는 친애함을 드러내니(나타나게 돕는 것이니) 왕이 삼면에서 몰아감에 앞에 있는 짐승을 놓아주고 읍인도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
밖으로 드러나게 돕고 친해야 되는 때다. 군주(지도자)로서 광명정대하게 베풀어 친해야 하는 자리다. 인간 사회에서 나라든 단체든 모든 구성원이 대동단결해서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삼구법(三驅法)처럼 지도자의 입장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여 일을 추진하되, 도망가거나 피하는 사람을 쫓지 말고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경계하지는 않도록 해야 길하다.
구오가 움직여 변효가 되면 중지곤괘(重地坤卦䷁)괘가 된다. 곤괘는 수용적 우주다.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돕고 친하도록 하여 중용의 덕이 저절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상육, 친함에 처음이 좋지 않으니(돕는데 머리가 없으니) 흉하다.”
상육은 처음에 제때 친하지 않아서 흉한 때다. 정(正)하긴 하나 육삼과 무응(无應)하고 구오와 상비(相比)하나 늦어서 흉하다.
상육이 움직여 변하면 풍지관괘(風地觀卦䷓)괘가 된다. 관괘는 ‘봄’ ‘관찰’이다. 손괘(☴), 간괘((☶)가 생겼다. 겸손하게 산으로 숨듯이 그치고 있어야 한다.
<참고 문헌>
[주역전해], 김경방 여소강, 심산
[도올주역강해], 도올 김용옥, 통나무
[대산주역강해], 대산 김석진, 대유학당
철산주역강의, 경기홍역학회,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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