旣濟, 亨小 初吉終亂.
기제는 형통할 것이 작은 것이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 처음은 길하고 나중은 어지러우니라.
初九, 曳其輪 濡其尾 无咎.
초구, 그 수레바퀴를 뒤로 당기며 그 꼬리를 적시면 허물이 없으리라.
六二, 婦喪其茀 勿逐 七日得.
육이, 지어미가 그 가리개를 잃었으니 쫓지 않으면 칠 일에 얻으리라.
九三, 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
구삼, 고종이 귀방을 쳐서 삼 년 만에 이기니 소인은 쓰지 말라.
六四, 繻有衣袽 終日戒.
육사, 물이 새는 데 해진 옷을 두고, 종일토록 경계함이라.
九五, 東鄰殺牛 不如西鄰之禴祭 實受其福
구오, 동쪽 이웃의 소를 잡음이 서쪽 이웃의 간략한 제사가 실제로 복을 받음 만 못하니라.
上六, 濡其首 厲.
상육, 그 머리를 적심이니 위태하니라.
수화기제(水火旣濟䷾)는 ‘이미 끝남’, ‘이미 건너감’, ‘완성’, ‘완벽’, ‘마무리’이다. 괘의 모습도 양효는 홀수 자리에, 음효는 짝수 자리에 있어 그 자리가 모두 바르다. 또 여섯 효가 모두 위아래로 서로 응한다. 그래서 모든 험난한 과정을 ‘이미 다 건너’ 해결된 완전무결한 모습이다. 더 형통해질 것도 거의 없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렇다면 안 좋아질 일만 남는다. 다 올라갔다면 내려갈 일만 남고, 다 찼으면 비워질 일만 남는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길하고 나중에는 어지러워진다.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려면 바르게 해야 한다.
이미 완전무결하다면, 수레바퀴를 뒤로 당기듯이, 꼬리를 적시듯이 함부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 여자의 가리개와 같은 것을 잃더라도 대세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면 자연스럽게 때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3년간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엄청난 고난의 겪은 뒤에 성취했다면 ‘소인’과 같이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는 사람을 쓰지 않아야 한다. 어렵게 완성한 일을 한순간에 망칠 수 있다. 배에 물이 스며들 듯이 언제 빈 틈이 생길지 모르니 늘 경계해야 한다. 의식(儀式)을 성대하게 하는 것을 자제하고 검소하게 해야 복을 받는다. ‘이미 건너서 완성된 것’에 취해 있다가 머리를 적실 정도로 물이 새는 걸 모른다면 위태롭다.
‘물’은 생명을 살리는 이로움일 수도, 생명을 죽이는 고난일 수도 있다. ‘이미 건너서 완전무결’해졌다면, 건널 때의 ‘물’은 험난함이다. 물을 건너면 성취고 완성이고 능력이 커지는 ‘이로움’이다. 주역의 괘사와 효사에 ‘이섭대천(利涉大川)’이 아홉 번 나온다. 건너야 되는 물에는 도랑이나 개울도 있고 큰 강이나 바다도 있다. 큰 물일수록 건너기가 어렵지만, 건넜을 때 성취도나 능력의 향상 폭도 더 커진다. 건널 수 있는 능력과 때를 잘 가늠해야 한다. 건너다 꼬리를 적시면 허물이 없을 것인가, 부끄러울 일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물을 못 건너면 고난의 연속이거나 ‘죽음’이다. “임이시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 공무도하가이다. 죽을 걸 알면서도, 또는 죽음을 무릅쓰고 ‘건너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물을 건너는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고 떠나는 사람에 대한 슬픔이나 무력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박목월의 ‘이별가’에서도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강물’로 표현된다. ‘강 건너’의 저승은 더 이상 같은 언어로 소통이 안 되는 다른 공간이다. 기독교 문화에서도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 강을 건너서 간다면, 이 세상으로 올 때도 강을 건너 오는가? 플라톤의 『국가』에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레테’ 들판을 흐르는 강물을 마셔야 한다. 이 강물을 마시면 ‘이데아’를 망각하게 되는데, 많이 마실수록 우둔해지고 조금 마실수록 똑똑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 아무튼 플라톤도 ‘완전한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는 이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화기제’는 모든 문제(험난)가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희망하면서 살지만, 정작 아무런 고난이 없으면 존재 이유가 없어져 몸은 스스로를 죽인다. 죽음이,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본질로 돌아가는 것’인지는 죽어봐야 알리라.
인간의 삶은 불완전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완성이나 완벽을 바라지만, 완전해지면 뭔가 갑갑하고 불안하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동생에게 소개시켜 주기 싫은 남자 5순위가 잘 생기고 성격 좋고 직업 좋은 남자였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 동화가 생각난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빠진 이에 꼭 맞는 조각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너무 크거나 작거나 한 것들을 맞춰보고 하다가 딱맞는 조각을 끼우게 된다. 이가 딱 맞아서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니까, 멈출 수가 없어서 다시 빼내어버린다는 내용이다. 다른 집을 방문했을 때 완벽하게 정리정돈과 청소가 잘 되어 있으면 편하지 않다. 모든 일의 아귀가 딱딱 잘 맞으면 뭔가 두렵고 불안하다. 인간은 영생불멸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오는 근본적인 두려움이 아닐까? 수화기제(水火旣濟䷾)처럼 모든 게 딱 들어맞는 것은 ‘신(神)이나 절대자의 세계’에만 있는 질서이고 상태가 아닐까? 인간의 삶에서 수화기제는 있더라도, 실제는 불완전한데 일시적으로 완전하다고 느끼는 국면이 아닐까? 『중용』에서 성(誠)한 것은 하늘의 도(道)이고 성(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라고 말했듯이, ‘완전함’ 그 자체는 천지자연의 이치이고 인간은 완전해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으리라. 인간 세상에서 ‘완성’은 하나의 단계를 마무리하는 의미이리라.
수화기제(水火旣濟䷾)는 물이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다. 물은 아래로 내려가려 하고 불을 위로 올라가려 하기 때문에, 수승화강(水升火降)이 천지만물이 조화할 수 있는 기운의 모습임은 알겠다. ‘태평(泰平)’의 지천태괘(地天泰卦䷊)도 같은 원리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불 위에 물을 부으면 불이 꺼지지 않는가? 솥이 있어야 한다. 솥 안에 물을 붓고 채소와 고기 등의 음식 재료를 넣고 밑에서 불을 때면 솥 안의 음식들은 끓고 익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솥에 넣고 끓인다고 채소가 고기가 되고 고기가 채소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채소 그대로, 고기 그대로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채소에 고기 맛이, 고기에 채소 맛이 배어든다. 모두가 조화를 잘 이루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과 불이 적절한지, 솥에 구멍이 생기지 않는지, 솥에서 삶은 음식이 적절하게 분배되는지 늘 경계해야 하리라.
살아가면서 어렵게 무엇을 완성하고 나서 그 성취감이나 우월감 때문에 생기는 오만함이나 안일함에 무너져 오히려 더 안 좋아지는 경우를 본다. 물론, 수화기제(水火旣濟䷾)에서 말하는 대로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바르게 하면 된다. 배 밑바닥에 물이 새어 들어오는지, 솥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어나가는지 끊임없이 살피면서 경계하는 삶은 좀 힘들고 피곤하기도 하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잘 해도 ‘완성’은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나의 단계가 마무리 되었을 뿐이고, 죽을 때까지 그 단계를 끊임없이 높여가면 된다. 그러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단계가 없어, 죽기 전에 도(道)를 깨닫거나 무념무상할 수 있는 해탈의 경지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이것도 피곤하면 일부러 ‘완성’을 하지 않고 남겨두면 된다. 겸손하고 모르고 부족한 게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면 된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뭔가 한 구석이 비어있는 듯, 뭔가 어설퍼거나 엉성하거나 멍청하거나 덜떨어진 면을 보여주면 된다. 노력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덜 감추기만 하면 된다.
수화기제괘(水火旣濟卦䷾)의 도전괘(倒顚卦), 배합괘(配合卦), 역위생괘(易位生괘), 호괘(互卦)는 모두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이다. 모든 완성은 새로운 미완성의 시작이다.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참고 문헌>
[주역전해], 김경방 여소강, 심산
[도올주역강해], 도올 김용옥, 통나무
[대산주역강해], 대산 김석진, 대유학당
[철학VS철학], 강신주,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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