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 盥而不薦, 有不顒若.
관은 손을 씻고 아직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처럼 하면 진실함을 가지고 우러러 볼 것이다.
初六, 童觀, 小人无咎, 君子吝.
초육은 어린아이의 봄이니 소인은 허물이 없으나 군자는 부끄러울 것이다.
六二, 窺觀, 利女貞.
육이는 엿봄이니 여자가 바름을 지키면 이롭다
六三, 觀我生, 進退.
육삼은 나의 행동거지를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난다.
六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육사는 나라의 성대한 모습을 봄이니 왕에게 벼슬하러 나아가는 것이 이롭다.
九五, 觀我生, 君子無咎.
구오는 나의 행동거지를 보되 군자이면 허물이 없다.
上九, 觀其生, 君子無咎.
상구는 그 행동거지를 보되 군자이면 허물이 없다.
바람이 세게 불 수도, 약하게 불 수도 있다. 바람이 부는 세기와 방향에 따라, 땅 위의 흙, 돌멩이, 풀, 나무 들은 흔들리거나 날리거나 꺾이거나 깎이거나 뽑힌다. 풍지관괘의 관(觀)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스며들고 관통하는 바람이다. 이런 바람이 불 듯이 세상을 보거나, 민중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이런 바람에 반응하는 풀이라면,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속속들이 따뜻하게 어루만지듯 부는 바람이라면 풀도 아주 부드럽고 편안하게 그 바람결에 따라 몸을 살랑거릴 것이다.
주역에 나오는 관(觀)을 보자. 산화비괘에 관호천문(觀乎天文;천문을 관찰함), 관호인문(觀乎人文;인문을 관찰함)이 나온다. 산지박괘에 관상(觀象;상을 관찰함)이 나온다. 산뢰이괘에 관뢰(觀頤;사람이 길러내는 것을 관찰함), 관기소양(觀其所養; 길러내는 방도를 관찰함), 관기자양(觀其自養; 스스로 길러낼 방도를 관찰함), 관아(觀我;나를 살핌)가 나온다. 관(觀)은 생김새나 색깔 등을 보는 게 아니다. 바람처럼 지나가며 보고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바를 보는 것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관(觀)을 보자. 1장에 故常無(고무상), 欲以觀其妙(욕이관기묘), 常有(상유), 欲以觀其徼(욕이관기요)이라는 구절이 있다. 번역하면,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도의 작용)을 나타내려(보려) 함’이다. 16장 吾以觀復(오이관복)은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를 봄’이다. 관(觀)은 감각으로 인식되는 물리적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관(觀)을 보자. 불교에서 관(觀)은 불교의 진리를 직관하는 수행법이다. 일체법의 근본이 공이라고 보는 공관(空觀), 육체가 하나의 백골이라고 보는 백골관(白骨觀) 등이 있다. 원효(元曉)는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에서 대승지관법(大乘止觀法)을 설명했다.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관법이다. 무상관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영구불변한 것이 없으며, 쉬지 않고 변한다고 보는 것이다. 고관(苦觀)은 중생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무아관은 모든 의식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자주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부정관은 세상의 모든 육신은 갖가지로 더럽혀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를 본다는 ‘관세음(觀世音)’도 있다.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사자와 같이 소리에 놀라지 말고, 바람과 같이 그물에 걸리지 말고, 연꽃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사전에 나오는 관(觀)을 보자. 관찰(觀察), 관조(觀照), 관념(觀念), 가치관(價値觀), 세계관(世界觀), 관점(觀點), 관측(觀測), 선입관(先入觀), 직관(直觀), 경관(景觀), 관광(觀光), 객관(客觀), 주관(主觀) 등 관(觀)이 들어가는 한자어는 947개라고 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세상을 뭐라고 보느냐’, ‘그 사람을 그렇게 보느냐’고 말한다. 모두 시각적 인식으로 바탕으로 하지만 그 자체의 형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관(觀)은 손을 씻고 아직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처럼 하면 진실함을 가지고 우러러 볼 것이다.’ 제사는 인간보다 차원이 높은 신(神)적인 존재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대체로 인간사에 좋은 일을 기원하는 일이다. 마땅히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공손하고 경건하게 지극한 정성으로 해야 한다. 제사를 모실 때 ‘손을 씻고 아직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는 그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엄숙하고 공손한 순간이다. 위정자가 또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런 느낌의 바람처럼 민중이나 아랫사람을 본다면 어찌 사람들이 우러러 보지 않겠는가. 좀 풀어서 말하면, 윗사람이 손을 씻고 아직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처럼 깨끗하고 공손하게 지극한 정성을 다함을 보여준다면, 아랫 사람들이 진실함을 가지고 우러러 보는 것을 볼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윗사람이 보여주고, 그것을 아랫사람이 보고, 그 아랫사람들이 보는 것을 윗사람이 본다. 지도자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다. 지도자는 국민을 통해서 자신을 보고, 국민은 지도자를 통해서 자신들을 보게 된다.
‘초육은 어린아이의 봄이니 소인은 허물이 없으나 군자는 부끄러울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무지몽매하거나 유치하게 봐도 초보거나 소인이면 허물이 없다. 어린아이나 소인은 잘못 봐도 자기만 손해 보면 끝이다. 군자이면서, 즉 지도층이면서 무지하고 유치하게 본다면 비루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육이는 엿봄이니 여자가 바름을 지키면 이롭다.’ 초육에 비해 육이는 조금은 지식이나 경험이 생긴 상태다. 이럴 땐 엿볼 수밖에 없고, 엿봐야 되는 상황이 있다. 다만, 엿보는 것도 바르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여자 남자가 만난지 얼마 안돼 서로 조금만 알 때는 살짝 엿본다. 처음엔 발끝이나 손끝만 살짝 본다. 전면적으로 볼 수가 없는데, 모든 것을 다 볼 듯이 하면 판 자체가 깨지기 십상이다. 사실 연애는 살짝 엿보이는 패로써 그 다음 전개될 패를 걸어보는 일종의 도박이다. 퓌라미스는 바빌로니아 동네에서 가장 멋진 총각, 티스베는 그 동네 가장 예쁜 처자였다. 두 사람 집은 붙어 있었는데, 벽에 난 구멍을 통해 엿보다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는 게 적을 때는 살짝 엿보다가 끌려서 점차 더 넓고 깊게 만나게 된다.
‘육삼은 나의 행동거지를 보고서 나아가고 물러난다.’ ‘생(生)’은 행동거지, 동작이나 시위(施爲;어떤 일을 베풀어 이룸), 생김새, 생동(生動), 생활(生活)이다. 육삼은 구오와 아직은 거리가 멀고 능력도 부족하다. 자신의 생동감, 행동거지, 생활, 능력, 조건 등을 보고 나아감이나 물러남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육사는 나라의 성대한 모습을 봄이니 왕에게 벼슬하러 나아가는 것이 이롭다.’ 관광(觀光)에서 광(光)은 빛나는 즉 아름답고 뛰어난 경치나 사물이다. ‘국지광(國之光)’도 나라의 빛나고 아름다움이다. 나라가 어렵거나 혼란스러울 때 벼슬길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국가는 실체가 없다. 사실은 통치자가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육사가 구오와 가까이 있듯이, 통치자와 가까이 있을 때 이 판단이 유효하다. 나라나 그 통치자가 빛나는 국면이 아닐 때 정치에 나섰다가 제대로 일도 못해 보고 욕만 볼 수 있다. 나라의 상황이나 통치자의 됨됨이가 빛남을 잘 봐야, 나도 빛날 수 있다.
‘구오는 나의 행동거지를 보되 군자이면 허물이 없다.’ 구오는 육삼과 같이 자신의 생(生)만을 보고 진퇴(進退)를 판단하면 안 된다. 통치자로서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생(生)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지도자(군주)는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보는 민중의 모습을 봤을 때 군자스러우면 허물이 없다. 또는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보고 반응하는 민중이 군자스럽게 보이면 그 지도자의 삶에 허물이 없다.
‘상구는 그 행동거지를 보되 군자이면 허물이 없다.’ 현직에서 물러난 지도자의 생활을 민중들 봤을 때 군자스러우면 허물이 없다. 또는 물러난 지도자의 생활에 반응하는 민중이 군자스러우면 그 지도자의 삶에 허물이 없다.
점(占)은 변해가는 과정 중에 찍어보는 하나의 점(點)이다. 또 같은 점괘라도 자리[位]와 때[時]를 고려하여 봐야 한다. 풍지관의 음양이 바뀐 배합괘는 뢰천대장(雷天大壯䷡)이다. 음양이 바뀌어 바람이 잘 불면 사람이나 사물을 더욱 커지고 무성하게 할 수 있다. 풍지관의 괘상을 거꾸로 한 도전괘는 지택림(地澤臨卦䷒)이다. 높은 곳에 있는 지도자가 때로는 낮은 서민들의 삶에 임(접근)하여 보고 그 성장을 도와야 한다. 풍지관괘의 상하 괘 위치를 바꾼 역위생괘는 지풍승(地風升䷭)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정치인이 서민 입장이 되고, 서민이 정치인 입장이 되어 생각해본다면 모두의 삶이 상승하리라. 일 년에 딱 한 달씩만 맞바꾸어, 그 일 그대로 하고 그 임금(賃金)만 가지고 살아본다면 삶의 질이 얼마나 나아질 것인가. 풍지관괘의 겉효를 떼고 속에 있는 효(2,3,4/3,4,5)로만 상하괘를 재구성한 호괘(互)卦)는 산지박(山地剝䷖)이다. 음효가 성하여 벗겨지고 깎이는 위기 상황에 지도자는 어떤 바람이 되어야 할까. 23년이 그러한 때가 아닐까. 끝나지 않는 코로나19ㆍ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무너지는 세계화와 다시 높아지고 있는 무역장벽, 인구감소, 이상기후……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세상이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이럴 때일수록 사회지도층은 무리하게 투자하거나 추진하지 않고, 민중들의 삶을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처럼 보살펴 안정시켜야 하지 않을까.
<참고 문헌>
[주역 전해] 김경방 여소강, 심산
[도울 주역 강해] 도올 김용옥, 통나무
[대산 주역 강해] 대산 김석진, 대유학당
[주역 입문 강의] 고은주, 북 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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