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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어린 왕자와 우물

by 두마리 4 2025. 3. 28.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른을 위한 동화다. 어린이가 어린이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왕자처럼 살고 있는데 왕자를 알 필요는 없다. 한 때 어린이었다가 지금은 그것을 가맣게 잊어버린 어른이 읽어야 할 동화다. 한 때 왕자였지만 그것을 까맣게 잊고 사는 어른들이 읽어야 할 동화다.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설명하려고 한다. 어른이 되면 명시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어른이 되면 명확하게 규정하고 그 규정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른이 되면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것에 모든 것을 매어두려고 한다. 어른들은 경계와 구속이 없는 것을 불안해한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싫어한다. 어른들은 대부분 존재로서의 삶을 잃고 소유 양식의 삶의 욕망에 혈안이 된다. 어른들은 허영과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한다.

 

어린 왕자는 비행기가 사막에 불시착했을 때 나타났다가 비행기 수리가 끝났을 때 사라진다. 사람들은 거의 죽음에 직면해서야 지난 삶을 반성한다. 자신의 삶이 죽음과 맞닿아 있음을 느낄 때가 되어야 소유로서의 삶을 반성한다. 죽기 몇 초 전에야 삶을 반성하고 곧 죽어버린다. 삶에 지쳐 기진맥진해야 사막의 우물과 같은 동심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치유한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나면 다시 소유와 경쟁의 메마른 삶으로 되돌아간다.

 

어린 왕자는 문명에 대한 반성이다. 반성은 하지만 끝내 비문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슬픔이 배어 있다. 어른

은 문명이다. 인간의 문명은 밝고 빛나는 발전이지만, 그 이면은 혼란스럽고 더럽운 증오와 혐오와 온갖 갈등과 협잡이 들끓는다. ‘어린’ ‘왕자는 어른과 문명이 잃어버린 자유와 상상이며 동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문명의 분별을 뛰어넘는 장자의 통나무다. '어린 왕자'에는 노자의 도와 무위가 있다. ‘어린 왕자는 온갖 제도와 질서와 기존의 관념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꾸역꾸역 사막을 건너는 니체의 낙타가 아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을 제외한 어떤 짐도 거부하는 니체의 사자도 뛰어넘는다. ‘어린 왕자는 제도와 관념을 망각하고 새롭게 창의적인 놀이를 하는 니체의 어린아이.

 

우리가 만난 우물은 사하라 사막의 우물과는 달랐다. 사하라 사막의 우물은 단순히 모래에 뚫린 구멍일 뿐인데, 이 우물은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우물이었다

 

마을에도 중앙에 우물은 있었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우물이다. 사막의 샘물도 중요하지만 마을의 우물도 중요하다. 우물이 없으면 마을도 사람도 없다. 샘물이 없는 사막은 아름답지 않다.

 

우물이 있어도 우물과 같은 사람이 없다면 샘물이 없는 사막과 다름 없다. 우물과 같은 사람은 우물처럼 중요하다. 마을은 바꿀 수 있어도 우물은 바꿀 수 없다. 우물은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어야 한다. 우물은 모두가 함께 길러 마시듯, 사람도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우물처럼 길러져야 한다. 내가 물을 퍼먹지 못한다고 해서 우물의 쪽박을 깨어서는 안 된다.

 

-어린 왕자(생텍쥐페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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