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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

by 두마리 4 2024. 9. 14.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

-맡겨진 소녀(클레어 키건)을 읽고

 

어릴 때,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시절에 남의 집에 맡겨진다면 어떨까. 대체로 낯설고 불편하고 불안하고 외롭고 서먹하고, 엄마 아빠와 형제자매가 그리울 것이다. 맡겨진 집이 훨씬 풍족해도, 더 누추하고 옹색하고 부족한 자기 집에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맡겨진 소녀(원제:foster)의 주인공 소녀는 어머니가 동생을 출산하는 등의 가정 형편 때문에 여름 한 철 외가쪽의 친척 집에 맡겨진다. 맡겨진 집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다른 무엇을 느끼게 해준다.

 

소녀는 맡겨진 첫날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이 마당을 가로지름을 느낀다. 그 집의 우물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을 느낀다.

 

아저씨는 아버지가 한 번도 잡아준 적이 없는 손을 잡아준다. 아저씨는 현관 앞에서 출발하여 우편함에 우편물을 찾아오는 달리기를 매일 시키며 기록을 재 주며 소녀가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게 될 것이라고 격려한다.

 

아주머니는 소녀를 따뜻한 물로 목욕시켜 주고, 무릎에다 앉히고 발을 어루만져 주고, 귀지를 파주고, 머리카락을 빗고 땋아준다. 소녀는 새롭게 느끼는 편안함이 오히려 불안해서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만 하루하루 전날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상처가 있었다. 맡겨진 소녀는 그로 인해 무너진 삶의 균형을 잡아주고 그 상처를 치유해준 셈이 되었다. 소녀는 맡겨진 여름 한 철 동안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고 깨달았고 성장했다.

 

단편 소설이라 하기엔 길고, 중편이라 하기엔 짧다. 소설 작품도 소녀처럼 매끈하고 깨끗하고 연약하다’. 표현들이 맡겨진 집의 우물 물처럼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묘사나 설명이 절제되어 쉽고 간결하다.

 

암시와 복선이 과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아빠가 포티파이브 카드 게임에서 빨간 소트혼 암소를 잃었던이라는 구절은 아버지의 사람됨을 전부 말해준다. ‘공기에서 뭔가 어두운 것으로 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한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는 표현은 소녀의 과거 삶과 현재 심정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인 한 문장을 골라봤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아.” 삶의 태도를 배운다. 내 삶과 다른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자세를 본다.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가끔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인생이다.

 

어쩌면 인생은 맡겨진것이 아닐까. 온전히는 아니고 일정 부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시기는 부모에게 맡겨졌었다. 또 부모님의 삶은 나에게 맡겨졌던 부분이 있다. 결혼해서 아내에게 맡겨지고 아내는 나에게 맡겨진 점이 있다. 자식이 생겨 나에게 맡겨지고 그 자식은 또다른 사람에게 맡겨지기도 하고 또다른 사람을 맡기도 한다.

 

삶의 피륙은 우연과 필연으로 짜여진다. 내가 의도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은 모든 만남은 우연이고 운명이다. 우연한 만남 위에서 필연적인 만남이 만들어진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은 운명이지만, 부모의 의지와 나의 의지에 따라서 삶의 많은 것들이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우연적 운명은 필연으로 전개되고 필연이 쌓여서 우연적 운명이 된다. 우연적 운명을 바꾸는 것이 혁명이다. 혁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바꾸면 한 달 두 달이 바뀌고, 한 달 두 달이 바뀌면 일 년이 바뀐다. 일 년 이 년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녀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킨젤라 아저씨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순간의 변화가 혁명의 시작이다.

 

주역 택화혁괘(澤火革卦䷰)의 괘사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는 이유를 알겠다. 원형이정은 만물이 나고 자라고 여물고 거둬지는 사계절의 원리이다. 이 네 가지 원리는 순간순간, 하루하루의 변화가 축적되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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