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의 『긴긴 밤』을 읽었다.
코뿔소인 노든은 코끼리들의 고아원에서 코끼리로 자란다. 코끼리가 된 노든은 코뿔소가 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코뿔소 노든은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다른 코뿔소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딸을 낳는다. 노든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다른 코뿔소와 함께 코끼리에서 코뿔소가 되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노든은 인간들의 총격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고 자신도 총알을 맞고 죽을 처지에 놓인다. 노든은 또다른 인간들에 의해 구출(?)되어 ‘파라다이스’ 동물원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동물원에서만 자란 ‘앙가부’라는 코뿔소를 만난다. 노든은 앙가부를 통해 동물원 세계를 보고, 앙가부는 노든을 통해 동물원 바깥 세상을 보게 된다. 노든과 앙가부는 동물원 탈출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앙가부는 뿔탈취범에게 뿔을 잘리고, 노든의 뿔은 탈취를 막고자 하는 동물원 직원들에 의해 잘린다. 노든은 뿔 없는 코뿔소가 된다.
어느날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버려진 펭귄 알이 발견된다. 그 알을 치쿠와 윔보라는 수컷 펭귄이 품어서 부화를 시키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으로 모두 죽고 노든과 치쿠만 살아남는다. 치쿠는 양동이를 부리로 물고 그 안에 담긴 펭귄 알을 지킨다. 노든과 치쿠는 여정을 함께 하며 ‘우리’가 된다. 그러다가 치쿠가 죽고, 얼마 뒤 알에서 펭귄인 ‘나’가 부화한다. ‘나’는 코뿔소와 바다로 향한 여정을 계속한다. ‘긴긴 밤’ 코뿔소의 이야기를 들으며 코뿔소로 자란다. 노든이 죽으면서 ‘나’에게 말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나’는 펭귄이 펭귄일 수 있는 바다로 간다.
이 책은 아동문학상 대상작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겪는 비극과 고통, 슬픔과 분노, 그로 인한 복수심 등은 아동이 감당하기에는 좀 무겁다. 주인공은 이런 고난을 ‘안간힘’을 쓰며 ‘악착’같이 ‘죽을힘’을 다해 이겨내며 살아남는다. 삶의 진면목은 이럴지도 모른다. 삶의 과정에서 환난이나 죽음의 위험은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른다. 살아있는 매 순간이 기적일지도 모른다. 늘 두려워하면서 조심하고 근심 걱정해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삶의 본질일지 모른다.
“알 바깥의 세상에서는 살기보다 죽기가 더 쉽다고 했다.” “나는 항상 남겨지는 쪽이었지.”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왜 살아야 하는 걸까? 먼저 죽은 사람들 덕분에 살아남았으니 그 몫까지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살기보다 죽기가 더 쉽다지만 죽음보다 삶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하게 때문에 대부분 살아남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늘 자신은 ‘살아남는 쪽’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노든의 삶을 보자. 고아가 되고, 아내와 딸이 죽임을 당하고, 동물원에 갇히고, 전쟁으로 동료가 죽는 등 어떤 고난이 닥쳐도 삶의 의지를 유지한다. 또 코끼리의 도움을 받아 코끼리가 되고 다른 코뿔소를 만나 코뿔소가 된다. 동물원에 가서는 동물원 바깥 세상을 알려주고, 펭귄에게는 펭귄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펭귄을 코뿔소로, 펭귄으로 성장하게 만들어준다.
『논어』에 ‘君子(군자) 周而不比(주이불비) 小人(소인) 比而不周(비이불주)’라는 말이 나온다. 군자는 두루 친하고 자기편끼리만 패거리를 만들지 않으며, 소인은 자기편끼리만 친하고 두루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든은 군자의 삶을 보여준다. 코뿔소이지만 코끼리, 펭귄 등 전혀 다른 종류와 화합하여 ‘우리’가 된다. 하지만 코뿔소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기도 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펭귄에게도 그대로 전수된다.
노든은 살아남기 위해서 아내와 딸을 잃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이야기를 통해 치유한다. 또 아내와 딸을 죽인 상대에 대한 복수심을 절제한다. 노든이 복수를 한다면 온전히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며, 노든 자신의 삶도 끝낼 각오를 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모든 복수는 그렇지 않을까. 노든은 고아로 태어난 펭귄에게 ‘긴긴 밤’ 자신과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펭귄이 코뿔소로, 펭귄으로 자라게 한다. 이야기는 삶의 피륙을 엮어주는 날줄과 씨줄이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 책의 첫페이지에 나오는 말이다. 누군가 대상의 본질을 알아서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그 이름을 통해서 대상을 알아간다. 그 이름은 ‘말’을 통해서 표현된다. 그런데 말은 대상의 본질을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말로 이름하는 순간 왜곡이 시작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도를 도라고 말하면 진정한(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말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야 진정으로 그 본질을 알 수 있는 면이 있다. 이름을 비롯하여 말로 표현되는 모든 앎은 참이 아닐 수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역설적인 다음과 같은 말이 이해된다.
“사람들은 노든에 대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들이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이야기의 후반부에 나오는 코뿔소 ‘노든’의 말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한편으론 규정이고 구속이다. ‘나’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진정한 ‘자유’의 상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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