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한병철)을 읽었다. 독일에서는 『자본주의 죽음 충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여러 챕터 중에 가장 솔깃한 내용이다.
모순적인 표현들이 단박에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치명적으로 매력적이다. 모순은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다. 논리나 합리(合理)는 제한된 국면이나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인류 문명의) 성장과 자기 파괴가 일치한다”
“인간은 살해함으로써 죽음을 막는다”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죽은 삶, 산 죽음을 낳는다”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타인을 만짐으로써 비로소 나를 만지고 나를 느낀다. 타인은 안정적인 자아의 형성에 필수적이다. 타인이 사라지면 나는 공허에 빠진다”
“신뢰는 앎과 모름 사이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내가 사전에 모든 것을 알면, 신뢰는 필요하지 않다”
선악(善惡), 미추(美醜), 합법과 불법, 장단(長短), 다소(多少), 고저(高低), 귀천(貴賤) 등 인간의 분별과 가치 판단은 모두 대칭적이다. 어느 한 쪽이 없으면 나머지 한 쪽은 가능하지 않다. 환자 없는 의사가 가능한가. 범죄자 없는 법조인이 가능한가. 불의(不義) 없는 정의(正義)가 가능한가. 악인(惡人) 없는 선인(善人)이 가능한가. 죽음 없는 삶이 가능한가.
인류의 문명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말한다. 점점 그 성장 속도는 빨라진다. 점점 더 규격화되고 획일화되고, 투명하고, 매끄러워지고, 긍정성과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에 따라 인류의 자기 파괴 속도 또한 빨라지는 느낌이다. 인류 문명의 발전 속도는 인류 멸종의 속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 인터넷 환경이 총체적 소통을 가능하게 했고, 이를 통해 총체적 감시와 착취가 가능해지고 있다. 더구나 개개인들은 자유로운 주인이나 경영자인 동시에 자신을 착취하는 노예와 노동자가 되고 있다.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 등이 이미 전산화되어 있다. 2003년부터 초중고 학생들의 교육행정정보가 인터넷 데이터로 집적되고 있다. 카드로 상품을 구매하고, 각종 기계와 센서로 건강을 진단하고, 인터넷으로 세금을 납부하고 정보를 검색하고 소통할 때마다 소비 형태, 가족 상황, 직업, 선호, 취향 거주 형태, 소득에 관한 개개인의 정보가 쌓여 빅데이터가 형성되고 있다. 우리의 심리, 행위들은 빅데이터 기업과 자본에 의해 이미 조종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이 가장 흥미롭다.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 개념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몰아내기 위한 무의식적 전략이라고 한다. 신자유적 자본주의는 죽음 충동을 삶으로부터 떼어놓아 설죽은 삶, 산 죽음을 지속시킨다. 언제부터인가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요양 병원, 요양원에서의 삶이야말로 삶과 죽음이 분리된 채로 ‘산 죽음’으로 생명만 연장되고 있는 적나라한 예가 아닐까.
자본주의는 죽음 충동을 삶으로부터 떼어놓는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기업 임원의 연봉은 수십 억원에서 일백억원을 넘는다. 그에 비해 그 기업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은 연봉 2~3천만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하층민들도 이런 수준의 벌이에 불과하다. 이들은 이 정도 돈으로는 사는 것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을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실제로 죽음을 불사(不辭)하면 이런 식의 착취는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아니라 절반이라도 죽음으로써 반발하면 혁명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누구도 그렇게 하기 힘들다. 신자유적 자본주의는 모든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도록 조종한다. 저자는 많은 청소년은 막연한 불안에 시달리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도 청소년들의 자해 행위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실패에 대한 불안, 좌절에 대한 불안, 버림받는 것에 대한 불안, 실수하는 것에 대한 불안, 그릇된 결정을 내리는 것에 대한 불안 자신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다. 불안은 우울증, 죄책감, 공허감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자해는 자기를 벌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껴보려는 의식이라고 말한다.
‘혁명’의 사전적 의미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다. 또는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혁명(革命)은 명(命)을 고치고 변하게 하는 것이다. 명(命)은 운명이다. 지렁이 새끼는 지렁이로 살고, 이무기는 이무기로 살고 용의 새끼는 용으로 사는 게 운명이다. 지렁이나 이무기가 용이 되면 혁명이다. 하층민이 지배층이 되거나 세상의 주인이 되면 혁명이다.
오늘날 한 개인이 운명을 바꾸는 것도 옛날보다 어렵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부모의 경제력, 지적 능력, 신체적 능력, 사회 문화적 배경, 계층적 자산이 자식에게 과거보다 훨씬더 더 많이 상속된다. 한 사회나 국가가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도 어렵다. 기존의 국가 시스템이나 사회 제도를 유지하려는 권력이 그 빌미를 주지 않는다. 반면에 혁명을 꿈꿔야 할 사람들은 열등감, 자책 의식과 우울감에 빠져 꿈도 꾸기 어렵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인류의 현대 문명을 비판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사실상 반문명적이다. 문명은 익숙함과 동일함, 매끄럽고 신속함, 전시와 공개, 투명성, 무한 긍정과 가능성만을 추구하여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저자는 낯섦, 느림과 지체, 고요, 비유와 감춤, 갈등, 타인, 에로스, 부정성, 불가능성 등에 주목해야 오히려 현대 문명의 병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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