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말이다. 무슨 뜻일까? 김찬호의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에 인용되어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노인’이 바다에서 낚시로 청새치 네 마리를 잡았으나 끌고 오는 동안 상어떼에 물어뜯겨 잔해만 남아 청새치를 더 잡을 의욕도 운도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를 ‘파멸’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인을 정성껏 보살피면서 관심과 지지를 보내고 노인에게 더 배우고 싶어하는 ‘소년’이 있기 때문에 ‘패배’는 아니라고 말한다.
‘패배’는 인생이 싸움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흔히 하는 비유이다. 경쟁이 심해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자신과의 경쟁 상대를 적(敵)으로 생각하고 사생결단(死生決斷)과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자세로 생활해야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뜻도 들어있다. 전쟁에서는 ‘적’을 죽여 없애야 승리하는 것이지만, 사회생활에서 싸움의 적은 ‘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동료이고 벗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궁극적으로 이겨야 할 적은 ‘바람직하지 않은 자신’이다. 그나마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게 ‘자신’이기 때문이다.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는 ‘삶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마흔 단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파국, 하산, 정정함, 전환, 눈물, 스토리텔링, 연민, 응시, 공동체, 경로, 혐로, 복지, 손님, 자존, 타인을 존중하는 원천, 망상, 고백, 지피지기, 멈춤, 줏대, 이순, 경청, 교학상장, 쓴소리, 탐구, 책, 유산, 독서, 도서관, 육아, 성숙, 보람, 선배, 시간, 후회, 상실, 유병장수, 연명, 존엄, 마을, 우선순위.
인용된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50의 나이에 성공의 욕구만큼이나 필요한 것이 바로 좌절 면역력이다’
‘존재를 멈추지 않고서는 어떤 생명도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승화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처벌을 받는 것과도 같다’
‘모든 행복을 자기 안에서 찾는 이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매 순간을 결코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인 바로 노년기다’
‘머지 않아 너는 모두 잊을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 너를 잊을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때로는 뜻밖의 행운이 될 수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지지불태(知止不殆), 멈출 줄 알면 위태로워지지 않는다’
‘나플레옹은 카이사르를 부러워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부러워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틀림없이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강물을 가장 쉽게 건널 수 있는 방법은, 강이 시작되는 곳에서 건너는 것이다’
‘판단과 평가가 없는 응시가 최고의 지성이다’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노인이 젊은이에게 귀기울이는 세계는 축복받아야 한다’(탈무드)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배울 게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이탁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을 때 예순 살이 온다’(주철환)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신형철)
‘싫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면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혹시 떠오르더라도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붓다)
‘매일을 마지막처럼 사는 자에게는 결코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세네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어라. 완전히 죽어라.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 다 좋다’(무난(無難) 선사)
‘어디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방에서 기다리게 하라. 죽음을 연습하는 것은 자유를 연습하는 것.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었다’(몽테뉴)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칭송하는 자, 삶을 넓힌다’(릴케)
나이가 들수록 적절한 ‘멈춤’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주역 중천건괘 문언전에 ‘이르러야 할 것을 알고 이르러면 미세한 기미에 대처할 수 있고, 끝내야 할 것을 거기서 마치면 의리를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르러야 할 곳 즉 도달 목표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능력의 한계를 잘 알 수가 없고, 노력이나 열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정도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 못 되는 것이 능력 부족인지 노력 부족인지, 세 번 네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계속 도전해야 하는지, 그만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 동안 자신이 해온 경험으로 그 능력과 노력의 한계를 가늠해서 멈추거나 더 나아가야 한다.
풍천소축괘(風天小畜卦䷈)의 ‘소축(小畜)’은 작은 축적이다. 작은 축적을 위해서는 작은 멈춤이 필요하다. 괘사에 빽빽하게 구름이 끼었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구름이 모여 이미 빽빽하지만 좀더 구름을 모으는 작은 축적이 필요한 상황이다. 산천대축괘(山天大畜卦䷙)의 ‘대축(大畜)’은 큰 축적이다. 큰 축적을 위해서는 산이 가로막는 큰 멈춤이 필요하다.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고 큰내를 건너듯 큰 험난함을 극복해야 한다.
멈춤의 다른 면은 우선순위다. 한꺼번에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은 멈춰야 할 때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 『대학(大學)』에 먼저 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알면 도에 가까워진다는 말이 나온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우선순위이다.
마흔 개의 단어 중에 ‘정정함’이 인상적이다. 저자가 말하는 정정함은 ‘정정(亭亭)’이다. 정정(亭亭)함은 나무 따위가 높이 솟아 우뚝함이나 늙은 몸이 굳세고 건강함이다. 정정(井井)함도 뜻이 좋다. 질서나 조리가 정연하거나 왕래가 빈번함을 이르는 말이다. 노년기는 멈춰야 할 때 멈추면서 정정(亭亭)함으로 정정(井井)함을 지속하려는 자세로 살아야 ‘패배’하지 않는 삶이 되지 않을까.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김찬호)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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