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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시 암송

by 두마리 4 2023. 9. 4.

메타인지의 힘(구본권)을 읽고 있다. 215쪽에 나오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미국의 인지신경학자 매리언 울프는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인 86세 어머니가 릴케와 괴테의 시들을 외워 수시로 재치 있게 활용하는 것을 궁금히 여겨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시를 암송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울프의 어머니는 혹시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더라도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간직하고 싶어서였지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다. 그래서 문자나 숫자를 배우지 못했다. 적을 수 없으니 모든 머리로 기억했다. 가족들 생일, 집안의 제삿날, 돈을 빌리거나 품앗이한 것, 다른 집안의 대소사 등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자 해독을 못하시면서 보따리를 서너 개씩이나 들고, 버스를 몇 번이 갈아타서 객지에 사는 아들네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신기해서 물은 적이 있다. 글자를 모르면서 어떻게 울산가는 차인줄 아시느냐고. 그냥 보면 알지 그걸 왜 모르냐고 반문하셨다. 문자를 이미지로 기억하셨다. 기록하는 보조 기억 장치가 없으니, 외우시는 능력이 특별히 발달하셨을 것이다. 아마도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여 일의 성격에 따라 나눠 기억하셨으리라.

 

동네에서 일어난 일을 가족들에게 옮기는 일은 무척 잘하셨다. 빨래터나 우물가, 또는 길쌈을 할 때 누가 어떤 식으로 말을 했다는 것은 생일이나 제삿날을 기억하는 것에 비해, 구체적인 사람과 상황이 있으니 기억하기가 무척 쉬우셨을 것이다. 표정이나 몸짓까지 너무나 생생하게 흉내내면서 전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너무 리얼해서 밥상머리에서 밥알 튀어나오게 웃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를 가르칠 때 늘 헷갈리는 점이 있었다. 좋은 시 몇 십 편을 외우는 것이 좋을까, 되도록 많은 시를 접해보는 것이 좋을까. 나 스스로에게도 헷갈린다. 시를 느끼기에 시 100편을 외우는 것이 좋을까, 1,000편을 읽어보는 게 좋을까. 옛날에 비해서 요즘은 좋은 글을 외우는 것을 잘 하지 않는다. 100편을 외우고 있으면서 적재적소에 인용하거나 암송하면 꽤 멋있을 것 같다. 시를 100편쯤 외우면 시정(詩情)이 생길 것 같다.

 

나치 치하의 절박함이 울프의 어머니로 하여금 릴케와 괴테의 시를 외우게 했으리라. 수십, 수백 편의 시를 외움으로써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게 되었으리라. 곤궁, 결핍, 고통, 시련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좌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겪고 이겨낸 자에게는 성장, 결실, 쾌락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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