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읽고 있다. 3장의 내용이 인상적이다. ‘떠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시뿐만 아니라 여러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시(詩) 외에 ‘화려할 때 미련없어 떠난다’며 퇴장한 서태지, 김훈의 ‘자전거 여행’, 영화 ‘사랑과 영혼’, 라이처스 브라더스 ‘언체인드 멜로디’, 클로드 모네의 그림 ‘양산을 든 여인’을 인용하고 있다. 시로는 이형기의 ‘낙화’, 조지훈 ‘낙화’, 복효근의 ‘목련 후기’,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김춘수의 ‘거울 속의 천사’ㆍ‘강우’, ‘바람’, ‘꽃’, 정지용 ‘유리창’ 등이 인용되고 있다.
떠남이나 이별을 말할 때 이형기의 ‘낙화’는 곧잘 인용되는 유명한 시구(詩句)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만남에서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지 좀더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가. 더구나 가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의 입장이다. 자신은 가야 할 때라고 알고 떠났는데, 남아서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 일찍 떠난다고 여길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늦게 떠나서 눈치를 줄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분명히 알고 돌아보지도 않고 결연히 떠나는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게 남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동백꽃, 매화, 복사꽃, 벚꽃의 떠남을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동백꽃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고,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목련에 대해서는 세상은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며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고 묘사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도 대부분 이렇게 느낀다. 매화나 벚꽃이 지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도 시들지 않고 무게도 없는 것처럼 미련도 주저함도 없이 떨어지며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와 같은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현실에서는 대부분 목련처럼 누더기가 되어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지는 꼴이리라.
복효근은 『목련 후기』에서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하면서 위안과 위로를 준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질척거리는 모습이 며칠이 아니고 몇 년 간 지속된다면 그래도 살아남는 게 좋다고 위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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