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들』(정은귀)을 읽고 있다. ‘조용한 일’(김사인), ‘먼 길’(권경인), ‘학살의 일부1’(김소연), ‘경이로움’(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벌레 먹은 나뭇잎’(이생진), ‘판문점, DMZ를 다녀와서’(로버트 하스), ‘자기 연민’(D.H.로렌스), ‘눈 감고 가다’(윤동주), ‘사랑은 야채 같은 것’(성미정), ‘눈을 어둡게 하는 것’(김기홍), ‘품어야 산다’(황규관), ‘물’(함민복), ‘한 골짜기에서’ㆍ‘어부’(김종삼), ‘이별의 꽃’(라이너 마리아 릴케), ‘일상에서의 은혜 체험’(카를 라너), ‘아일랜드 켈트 족의 기도문’, ‘어느 변증론자의 저녁 기도’(C.S. 루이스), ‘키모 치료’(줄리아 달링), ‘엄중한 시간’(라이너 마리아 릴케), ‘스타 마켓’(마리 하우), ‘내 자아의 노래’(월트 휘트먼), ‘정지의 힘’(백무산), ‘목가’(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24편의 시와 한 편의 산문에 대한 경험과 생각으로 감상을 쓰고 있다. 학자적인 평론이라기보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수필 같다. 시집과 수필집을 같이 읽는 느낌이다. 쉽게 친근하게 시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책에 인용된 시들 중에서 세 편만 골라서 전문을 적고, 간단한 감상을 써 본다.
「한 골짜기에서」 (김종삼)
한 골짜기에서
앉은뱅이 한 그루의 나무를
보았다
잎새들은 풍성하였고
색채 또한 찬연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잠깐이라지만
*앉은뱅이 나무란 다른 큰 나무에 눌렸던지, 가지가 부러지거나 잘렸던지 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과 달리 그 조건 속에서 자라서 잎새나 빛깔은 멀쩡한 나무나 다름없다. 인간과 달리 다른 다른 생명체는 자기 연민이나 공포가 없는 듯하다. 고목이 되어 원 줄기는 썩어버리고 가지 한 두 개만 남은 나무도 그 잎과 꽃은 생생하고 찬란하다. 사람이 파리나 모기를 잡으면, 몸통이 그대로 으깨지거나 박살난다. 파리나 모기가 두려움을 느낀다면, 죽을 뻔했다가 금방 다시 또 달라들겠는가.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 중에서
당신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 지갑에 언제나 한두 개의 동전이 남아 있기를.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기를.
당신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서는 가난하고
축북에서는 부자가 되고
적을 만드는 데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는 빠르기를.
이웃은 당신을 존중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당신이 죽은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이미
당신이 천국에 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신이 늘 당신 곁에 있기를.
*기도는 대체로 과분한 것을 바란다. 얼핏 보면 ‘언제나’라는 부사는 좀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 기도가 이루어지 어려운 것은 현실에서 실현가능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기도문의 내용 비교적 소박하다.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 과한 욕심일까. 언제나 돈이 있기를 바라는데 그것도 한두 개라고 할 만큼 적은 액수다. 발 앞에 언제나 길이 있기를 바라는 것도 소박하다. 굳이 좋은 길만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헤쳐나갈 ‘길’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따금’ 비가 내리길 바라고 ‘곧’ 그치기를 바란다. 불행은 없고 축복만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불행은 조금, 축복이 더 많기를 바란다. 적과 친구를 만드는 것도 ‘느리고’ , ‘빠르게’로 실현가능한 정도로 바란다. ‘바람은 언제나 등 뒤에서 불기를’ 바라고, ‘당신의 얼굴에 해가 비치기를’ 바라는 게 그나마 과한 욕심이다. 바람이 언제나 등 뒤에서만 불 수 있는가. 얼굴에 늘 해가 비치기만 할 수 있는가. 이 기도문은 대체로 들어줄만한 정도에 욕심을 담고 있어 해볼만하다.
「정지의 힘」(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우리는 늘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산다.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더 열정적으로 달리고 미래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산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세우고 멈추는 힘도 세상의 절반인데, 잊고 산다. 정지가 없으면 달림도 없다. 달리는 힘이나 멈춤의 힘은 같다. 올라갈 때는 그만큼 내려갈 일을 생각해야 한다. 잘될 때는 안될 때를 생각해야 한다. 사는 순간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죽는 힘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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