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수능 문제를 풀어보다 지문으로 나온 정끝별의 ‘가지가 담을 넘을 때’를 읽는다.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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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것은 가지만의 일은 아니다. 뿌리 없이 줄기 없이 이파리 없이 가지만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당연히 담도 넘을 수 없다. 한 사람이 하나의 장벽을 뛰어넘어 성장할 때도 단지 보이는 그 능력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사람을 믿어주고 지지해준 가족과 친구, 인정하고 공감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결과일 수 있다. 한 사회의 불합리한 억압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행위도 그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지지하고 응원하여 모아주는 힘이 있기에 가능하다.
고집 센 비처럼 지치지 않고 힘을 복돋워주는 필연적 상황, 폭설처럼 소리없이 쌓이는 우연적인 정감들이 장벽이나 억압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신명을 주기도 한다.
‘담이야말로 담을 넘는 것을 꿈꾸게 한다는 것’ 역설(逆說)! 담을 넘으면 그것은 하나의 문(門)이 된다는 것. 담을 넘다가 불구(不具)가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도박이 된다는 것. 담을 넘을 수 있는 능력이나 길은 담과 친해서 담의 속성을 깨달아야 얻을 수 있다는 것.
넘지 않는 담은 안온(安穩)이고 평화이면서 한편으론 금단(禁斷)이고 구속(拘束)이고 억압이고 한계다. 담을 넘는 것은 모험이고 위험이고 초월이고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인생은 역설(逆說)이다. 이별은 만남으로 비롯되고, 죽음은 삶으로 비롯된다. 인류는 대량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편으로 지극히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한다.
담을 만든다는 건 나의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 소유의 집이나 땅이 생기면 나무를 심거나 돌을 쌓아 담을 만든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경계짓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들이 쌓여 담을 이룬다. 담을 쌓으면 자신도 갇히고 밖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중요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자기 집도 아니고 자기 땅도 아닌데, 담을 만들고 사람들의 언행(言行)마저 담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은 담 위에 있거나 투명 인간처럼 담을 통과해 다니면서 넘어서는 안 된다는 금지와 경계의 담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개인들의 자유와 생각까지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수양 버들이든 개나 고양이든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는 담을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담을 만들고, 또 끊임없이 담을 허물거나 담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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