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쯤에 시골 고향에 갔었다.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시골집에 아버지 기제사를 모시려고 동생 내외와 함께 들어갔다. 점심 때쯤이라 잡초처럼 자란 돼지 감자를 좀 캤다. 이제 아무도 일삼아 따지 않는 감도 좀 땄다. 대나무 장대도 없고 그냥 따기엔 감나무가 너무 커버렸다.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 큰 가지를 통째로 잘랐다. 탱자만한 크기밖에 안 되는 땡감인데 익어서 가지에 달린 채로 거의 홍시가 된 것들이 있었다. 아침도 굶고 점심도 먹지 않은 오후 3시쯤에 먹는 홍시의 맛은 황홀했다. 산골의 차가운 공기 속에 먹는 차갑고 상긋하면서 시원한 육즙이 입안 가득히 퍼지는 홍시의 맛은 거의 울컥할 지경이다.
어릴 때는 삭혀서도 먹었다. 가을 소풍을 갈 때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삭힌 몇 개씩을 싸가지고 왔다. 김밥 한 줄, 과자 한 봉지에 사이다 한 병이면 남부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늦가을엔 감을 따서 수십 상자씩 팔았다. 감을 깎아 말려 곶감도 만들었다. 감 껍질도 버리기 아까워 말려두었다 간식으로 먹었다. 대봉감의 1/5도 안 되는 크기의 감이 그때는 작은 줄 몰랐다.
시골에서 도시로 감을 가져와 홍시를 만들어 먹었다. 시골에서 먹던 그 맛이 안 났다. 왜 그럴까. 시골의 집이 아니고, 그 산골이 아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느끼는 기운(氣運)이 없어서일까. 시골의 그 바람이 없고, 몇 시간이 걸려 시골까지 가는 마음과 설렘과 어릴 때의 추억이 없어서일까. 시골은 입맛을 길들인 결정적인 십 몇을 살았던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 눈에 보이지 않게 나를 길들여온 기(氣)가 있지 않을까. 시골에서 먹는 김치나 깍두기, 된장국 등도 도시로 가져오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 체육대회 때 먹었던 돼지고기 수육이 생각난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천막을 치고 그 아래 수육과 과일, 떡, 과자 등을 차려 놓고 먹었다. 그런데 천막의 색깔 때문에 음식들의 빛깔이 제 빛이 아니었다. 단지 빛깔만 달라졌을 뿐인데 맛이 영 다르게 느껴졌다. 신기하여 천막 밑을 벗어나서 먹어보니 금방 맛이 달라졌다. 맛을 좌우하는 데는 냄새와 빛깔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오늘 김장을 했다. 막걸리 한 잔을 하고 돼지 수육을 갓 담은 김치에 싸서 먹었다. 맛이 없을 리 없다. 텃밭에서 키운 무와 대파, 배추로 담은 김치다. 대파는 봄부터 키웠다. 무와 배추는 8월 중순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어 키웠다. 매일처럼 날씨를 보면서 애를 쓰고 몸을 썼다. 배추를 뽑고 절이고 양념을 치대는 것도 직접 하니 맛이 없을 리가 없다.
사먹는 김치도 맛있다. 절인 배추를 사서 김장을 해도 맛있다. 직접 배추를 기르고 뽑고 절이고 양념을 치대서 김치를 만들면 더 맛있다. 김치 한 포기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공간과 시간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기(氣)와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미립자가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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