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 무리들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왔다갔다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처음엔 이 불안이 아이의 센스없는 행동, 성급한 몸짓, 중심을 잃은 들뜬 모습때문이라고 못내 아이를 책망하느라 그것의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다'고 '사람은 저마다의 모습을 가졌다'고 온갖 위안꺼리의 말들로 포장해 나의 불안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런데 아이가 무리속에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불안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와 가슴 깊은 곳에 아련한 슬픔을 만들어낸다. 내가 잘못 키워서 그럴까? 내가 해주지 못한 어떤 부분이 지금의 아이를 저 모습으로 키웠을까? 자책의 시간이다. 맞다! 나는 아이와 나를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아들이 20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이라고 적고 있다. 한 존재로 온전히 존중하며 만나지 못했다. '키운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투입한 것에 대한 결과물로 나를 평가하고 평가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게 쉬웠던 적은 없다. 지금은 연륜으로 숨기고 적절히 다듬어 표현하는 스킬을 익혔을 뿐 관계속에 편히 쉬어 본 적은 없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친구들속에서도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가끔은 저만치 밀려나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무엇인가를 잘하고, 뽐내지 않아도 폼나고,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볼때면 나는 나를 '변두리'에 세운다. 내 안에 있는 오래된 '중심성'에 대한 선망은 단순한 질투의 감정이 아니라 중심으로 향하는 삶만이 올바르다는 뿌리깊은 신앙심으로 자리잡혀 있다. 내게 중심성을 향한 문화와 언어와 삶의 방식들이 믿음처럼 끈질기게 자리잡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깨야될, 깰 수도 있는 가치라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고 말이다.
사실 부러워만 했던 삶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인생 새옹지마의 굴곡을 그들도 겪는다. 또한 나에게 쌓이는 데이터들이 인생이 한 방향만 있지 않다는 것도 알려준다. '잘해야 된다'는 신앙이 불쑥 올라와 내 인식의 잣대로 마구 들이대지만 다른 한켠에선 분명히 삶의 어느 곳에 서있든 그곳은 늘 변하고, 각자가 맺는 관계의 장에 따라 다른 삶의 양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알려준다. 지금 현재의 그 상태를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중심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지금 빛나고 오래동안 사회가 요구하는 '잘하는 삶'을 유지하였어도 삶에 그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심으로 향하는 길은 한 방향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몸을 돌리면 360도 어디든 향할 수 있다. 나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중심만 쳐다봤지 변두리는 보진 못했다. 중심도 변두리도 그 어느 중간쯤도 모두다 생명있는 존재들이 머물 곳인데 말이다.
아들에 대한 내 불안을 일기장에 그냥 푸념으로 넘기기엔 한계치에 도달했다. 누군가를 보살피고 키운다는 엄마 역할에 갇혀서 한발짝도 못 나서는 것고 아들을 내 인식의 한계로만 대해서는 안되겠다는 반성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명을 가진 존재로 그를 봐줄 수 있는 내 역량을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만물의 동지로 다시 마주하고 싶다. 아직 중심성을 향한 신앙이 뿌리 깊어 잘 끊어내지지 않지만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듬고 그 변두리마저 찾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내 연민을 잘 다듬어 평안에 이르러 보고 싶다. 이 글은 그 여정으로 향하는 나의 첫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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