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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파동

강의 울림을 따라 걷기!

by 무진장 2023. 1. 19.

 

 

10년 전 처음 영주로 이사 온 여러 가지 이유 중 집 앞에 있는 내성천도 한 몫했다. 그때는 내성천 어디를 가든 깨끗하고 얕은 모래강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는 철퍼덕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냥 놀았다. 내성천은 그런 곳이었다. 지금은 예전만큼 풍부한 물도 깨끗한 모래도 많이 줄었다. 물론 전국팔도에 예전까지 않은 곳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런데 내성천은 영주댐이 들어서고 급격히 변해가는 것을 매일 내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강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예전보다 강 폭이 많이 좁아졌고 수풀도 무성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성천은 아름답다. 강 주변을 걷고 있노라면 내 생각의 길은 유순해지고 강처럼 쭉 쭉 뻩어 나간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많은 경험을 하게 해 준다. 걷기를 통한 몸의 경험만이 아니라 강이라는 매개를 따라 흐르는 내 생각의 파노라마도 함께 느끼게 된다. 강줄기의 굴곡을 따라 마주하게 되는 내 인생의 여러 국면도 떠올랐다 사라진다. 강은 첫 줄기가 뻗고부터 계속 흘러 왔겠지. 그렇듯 내 삶도 지금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겠구나. 강을 따라 걸을 때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오는 주인공이 아들을 찾으러 한참을 헤매다 다시 뱃사공 바주데바에게 돌아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에게 강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들려요?" 바주데바가 말없는 시선으로 물어왔다. 싯다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잘 들어봐요!" 바주데바가 속삭이듯 말하였다.

싯다르타는 더 잘 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의 모습, 자신의 모습, 아들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흘러가고 있었으며, 카말라의 모습도 나타났다가 스스르 녹듯이 사라져 버렸으며, 고빈다의 모습과 그 밖의 다른 모습들도 나타나 모두 한데 어우러져 흘러갔다. 모두가 강물이 되었다. 모두가 강이 되어 그리움에 사무쳐서, 갈구하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제 온통 귀기울여 듣는 자가 되어, 온통 듣는 데 몰두하였으며, 마음을 온통 비운 채, 온통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제는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끝까지 다 배웠음을 느꼈다. 진작부터 그는 자주 이 모든 소리들을, 그러니까 강물 속에 들어 있는 이 수많은 소리들을 들어왔었지만, 오늘은 그 소리의 울림이 새로웠다. 그는 더 이상 그 수많은 소리들을 서로 구분할 수가 없었으니, 기쁜 소리를 슬픈 소리와 구분할 수도, 어린애 소리를 어른 소리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평소 말을 쏟아 내기 바쁘지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아니 제대로 된 듣기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세상의 온갖 소리를 구분 짓거나 배제하고, 때론 특정한 말에 매달리고 거부하기 바빴지 그 소리를 온전히 듣는 것은 머나먼 경지의 일 같다. 다만 강을 따라 걷다 보면 매달리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흐르는 물의 자세를 조금은 배우게 된다. 타인의 말에 의해서든 내 머릿속 목소리든 듣기 싫고 거부하고 싶은 말들이 온전히 나를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못하지만 강 따라 펼쳐진 길을 돌아 오르막 길을 걷다 보면 내 생각은 다른 국면으로 벌써 건너가 있다. 내 안에 딱 걸려 한참 붙들어 곱씹고 있던 생각들로 헤매고 있다가 탁 트힌 내리막 길에 들어서면 마음은 다시 말랑해져 좀 전의 그 생각들은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다. 산만한 내 마음과 생각들이 이리저리 난 길들과 함께 모아졌다 흩어지길 반복하다 보면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 더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오히려 생각들은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들인지 알게 되고 그것들에 매달리지 않는 것이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이 내게 울림을 주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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