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수를 좋아한다. 한 번 먹으면 보통 세 그릇 정도는 먹는다. 물에 말아서 두 그릇 먹고, 고추장에 비벼서 한 그릇 먹는다. 쫄깃한 면을 좋아한다. 밀가루 반죽에 탄산나트륨을 더하면 쫄깃한 알칼리성 국수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면발이 쫄깃하고 탱글탱글한 국수를 먹으려면 삶을 때 타이밍도 중요하다. 국수 면발의 굵기에 따라 면이 익어가는 빛깔을 보고 있다가 건져내자마자 얼음 찬물에 식히면 더 쫄깃한 식감을 얻을 수 있다. 말아먹는 국수는 육수도 중요하지만, 양념장도 맛있어야 한다. 먹을 때의 상황도 맛에 영향을 미친다. 시골에서 모내기를 할 때 새참으로 먹었던 국수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면은 탱글하지도 쫄깃하지도 않았지만, 논밭 사이 언덕에서 국수 한 뭉텅이에 멸치 육수를 붓고, 부추 나물을 고명으로 얹고 파ㆍ마늘ㆍ고춧가루ㆍ참깨 등이 적절하게 배합된 양념장으로 간을 맞춰 먹던, 가족들이 둘러앉아 먹던,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국수 맛이 제일 그립다.
라면도 좋아한다. 중학교 때부터 자취를 했는데, 자취방에는 늘 라면이 박스떼기로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 라면을 한 번 먹으면 보통 두 개 정도 먹었고, 그 국물에다 식은 밥을 말아먹었다. 라면만 먹을 때는 세 개를 먹었다. 어떤 때는 다섯 개를 먹었다. 3개를 끓이면서 기다리는 동안에 2개를 그냥 뿌셔 먹곤했다. 감자 라면을 좋아한다. 라면에 넣는 감자는 아주 얇게 썰어야 한다. 감자를 먼저 넣고 끓이다가 면을 넣어야 감자와 면이 같이 익는다. 요즘은 감자 전분과 분말이 50% 이상 함유된 ‘감자 라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썰어넣은 납작한 감자와 같이 먹는 라면의 식감은 특별하다. 라면을 쫄깃하게 먹으려면 아예 면만 따로 끓이는 게 좋다. 스프와, 감자, 양파, 김치, 가래떡 등 추가로 넣는 것은 익는 시간이 달라 따로 끓여서 면에 붓는 게 좋다. 뜨거운 라면을 먹을 때 샤브샤브처럼 상추, 쑥갓 등을 담궈서 같이 먹으면 느끼한 맛을 잡아주고 상큼한 풍미가 있다.
기억에 남는 라면이 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쯤으로 기억한다.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있었다. 흔히 말하는 야학이다. 학생들의 나이는 1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한 때 다녔던 학교다.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로 교사를 했고, 학생들은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저녁에 학교에 와서 공부를 했다.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면 검정고시 시험을 치는 데 일정 비율의 특전(일종의 기본 점수)이 주어졌다. 대구 북비산로터리 근처에 학교가 있었다. 학교 건물은 슬레이트 지붕에 흙바닥이었고, 구멍이 한두 군데 나 있기도 했다.
교무실도 사정은 비슷했다. 교무실 바로 옆에 한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거의 판자집이었던 것 같다. 그집 아줌마가 남편한테 욕하는 소리가 교무실에 그대로 다 들렸다. 사발 깨지는 듯한 목소리로 남편한테 욕을 엄청 거칠게 해대서, 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그 아줌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다. 어느날 동아리 회원 중에 한 사람이 어쩌다 그 아줌마를 봤다는데 너무 고운 얼굴이라서 놀랐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회원들도 생살을 째고 소금을 뿌려대는 듯하게 해대는 무자비한 욕설과 고운 얼굴의 부조화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50평도 안 되는 운동장 한 구석엔 수도가 있었고, 화장실도 두어 칸 있었다. 철봉도 3개쯤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작은 화단엔 달맞이꽃이 있었다. 여름 달맞이꽃이 필 때 바로 눈앞에서 꽃잎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했다. 달맞이꽃과 야간 학교 학생들의 처지가 비슷한 면이 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야학 교사들끼리 회식을 할 때는 ‘달맞이꽃’이라는 노래를 교가처럼 부르곤 했다. 나는 그때 3학년 담임을 하고 있었고, 검정고시 기간이 가까워오자 학생들 중에 몇 명이 밤샘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공부한다고 남은 학생들이 잘 곳이 따로 없었다. 교무실 교사 책상을 침대 삼아 재우고, 교사인 나는 문앞에 작고 낡은 소파를 놓고 보초 서듯이 잠을 잤다. 아침에 학생들이 공장으로 출근하고 난 뒤 혼자서 호젓하게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가게에 가서 깻잎 한 묶음을 사와서 라면에 넣었다. 아직도 그 깻잎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짜장면과 짬뽕, 우동, 울면도 좋아한다. 서른 되기 전에는 거의 곱빼기를 먹었다. 칼국수도 갱시기도 좋아한다. 베트남 쌀국수도 좋아한다. 면으로 된 음식 종류는 거의 다 좋아한다. 하지만 수제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국수인 파스타나 스파게티 등도 좋아하지 않는다. 당면이 들어간 잡채도 싫어한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에 국수가 나온다. 국수와 경제학을 어떻게 연결할까 궁금했다. 국수(면) 소비면에서 세계 1위는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1인당 1년에 79.7인분을 소비한단다. 2위 베트남이고 3위 네팔이란다. 이탈리아는 국수 모양에 진심이라고 한다. 줄 모양, 납작한 끈 모양도 있지만, 튜브, 고리, 나사, 나비, 사람 귀, 조개, 낱알, 공, 마차 바퀴, 올리브 잎, 팽이, 라디에이터 모양 등 온갖 모양이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국수 모양에 열심이어서, 유명 산업 디자이너인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파스타 디자인을 의뢰했다고 한다. 주지아로는 아름답고 초현대적인 파스타 모양을 설계했다. 튜브와 파도 모양을 합친 듯한 모양이다. ‘마릴레’라는 이름까지 붙여 1983년에 출시했다고 한다. 주지아로는 자동차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렸다. 폭스바겐 골프, 마세라티 기블리, 로터스 에스프리 등을 디자인했다. 현대자동차가 1975년에 출시한 ‘포니’도 주지아로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아하 이렇게 경제학과 연결되는구나! 어쨌든 음식 레시피와 경제학이 연결된다.
1975년 현대자동차는 독자적으로 '포니'를 1만대 생산했는데 포드의 0.5%, GM의 0.2%였다. 현대자동차는 2006년에 포드보다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했고, 2015년에는 GM보다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했다고 한다. 삼성, LG, 토요타, 미쓰비시, 노키아, IBM, 인텔, 애플 등 세계적으로 성장한 기업들을 보면 현대 경제에서 기업은 더 이상 개인의 비전이나 노력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들고, 성공적인 기업은 집단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학 레시피』에서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엮어간다. 좀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그냥 경제학 이야기만 하는 것에 비해서는 좀 맛있게, 때로는 군침을 흘리면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마늘, 도토리, 오크라, 코코넛, 멸치, 새우, 국수, 당근, 쇠고기, 바나나, 코카콜라, 호밀, 닭고기, 고추, 라임, 향신료, 딸기, 초콜릿의 역사와 그것들이 재료로 들어간 음식 레시피를 말한다. 그러다 그에 관련된 경제학 이론을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다국적 기업과 보호무역주의를 말한다. 복지국가와 돌봄 노동을 말한다. 인공지능, 로봇의 발달과 일자리에 대해서 말한다. 경제적 평등과 공평성을 말한다.
‘국수’ 부분을 읽으면서 백석의 ‘국수’가 생각났다. 백석의 국수를 자판으로 치면서 음미해봤다.
국수/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면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통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겨울에 국수를 먹지 않았고, 주로 여름에 먹었다. 또 국수틀에 뽑아서 먹지도 않았다. 밀가루 반죽을 밀어서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백석의 ‘국수’에 나오는 국수의 역사와 전통, 그 분위기와 정서는 잘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온 산과 들판에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아이들은 토끼와 꿩 사냥을 하고, 어른들은 들쿠레한 부엌에서 뽀얀 김이 나는 면발을 뽑아내려 구수한 내음새가 온 마을을 점점 즐겁고 흥성흥성한 분위기로 무르익게 하고, 마침내 온 가족이 쩔쩔 끓는 아랫목에 모여 앉아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면발이 담긴 국수에 식초와 얼얼한 고춧가루를 뿌려서 수육과 동치미국물과 같이 먹는 그 맛은 안 먹어봐도 가히 알만하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읽고
*달맞이꽃 노래모음(같은 노래 다른 느낌) 원곡가수 이용복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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