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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으로 글쓰기/주역 散筆

주역의 쓸모, ‘더 글로리'를 보고

by 사각삼각 2023. 5. 2.

밤새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를 봤다.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학폭, 선생님, 엄마)을 복수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사람이, 그것을 해내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얼핏보면 복수를 하는 것은 군자라면 선택해서는 안되는, 소인의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드라마는 해피엔딩이다. 게다가 주인공은, 소인처럼 행동했을 때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신의 사람들까지 얻었다. 도대체 군자는 누구이고, 소인은 누구인가.
 
만약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문동은이 18세 때 이미 주역을 알고 있어서,
‘지금의 나는 이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라는 질문에, 동전을 던졌다고 해보자.
이 때 문동은은 어떤 괘를 받았을까?

아는 것만큼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번 주에 수업한 ‘천화동인’괘가 떠오른다. 문동은이 이 괘를 받았다면, 과연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왕부지의 건곤병건설-착종설에 의하면 천화동인(天火 同人)괘를 읽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괘를 입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시간상 전후로 순환되는 괘-시간상 대극에 해당하는 화천대유(火天大有)-노력하여 축적한 것을 잘 운영하는 것에 관한 괘-와 공간상 대극에 해당하는 지수사(地(水師)-전쟁을 해야만 할 때 갖춰야 자세의 괘와, 밖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나타내는 수지비(水地比)-비교하고 발전하는 경쟁할 때의 자세에 관한 괘가 그것이다. 또한 왕부지는 “드러난 앞면을 통해서는 온 것들을 알고, 그리고 온 것들은 괘를 체현하고 있고, 간 것들은 쓰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온전함을 체현한 뒤에 시(時)가 다다름이 모두 도가 걸려있는 것임을 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드러난 앞면인 천화동인괘의 효사에서 주는 지침들을 잘 따르면 화천대유의 길-축적한 것들을 잘 쓸 수 있도록 나아가게 된다는 것과, 천화동인-현남과 주여정 하도영 그리고 선영등 사람을 얻는 과정의 이면에는 지수사-전쟁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마치 전쟁을 앞두고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 모습이거나 전쟁을 치른 후 적들까지도 포용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을 세상사람들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두 개의 세력간의 경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복수를 마음먹고 그것을 준비해가는 과정은 속으로는 지수사(전쟁을 한다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하는 마음일 수 있으나, 겉으로는 천화동인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가. 다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자들을 모으고, 모였다. 또한 천화동인의 단계를 지나간 후에 문동은은 화천대유 그러니까 쌓은 것을 주여정에게 유한 자세로 베풀기도 하면서, 위엄을 가지고 지도하는 모습도 보인다. 따라서 천화동인의 도(道)를 이룬 것은 문동은, 아마도 천화동인하여 화천대유로 가는 길을 밟을 때의 문동은의 자세가 시간상 그리고 위치상 갖추어야 할 군자의 모습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복수를 하는 것-이 어떻게 군자의 모습이냐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군자는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까지도 포용하고 끌어안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나 군자는, 문동은의 입장인 경우에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인가.  문득 연진이의 대사가 떠오른다. ”내 덕분에 이 악물고 열심히 노력해서 선생까지 됐잖아.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연진이는 마치 군자를 비웃는 것 같다. 주여정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가 자꾸 의문을 표했던 구절, 의사가 그래도 돼요? 군자가 그래도 돼요?
 
그러나 주역에서는 좀 다르다. 그 상대가 포용할 대상이 아닌, 전쟁의 대상일 때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주역은 말한다. 물론 전쟁을 치른 후에는 서로에게 상처가 남을 수 밖에 없음 또한 이야기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것이 '군자의 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군자와 소인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자세를 가지고 대처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태도가 군자와 소인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요즘 삶 곳곳에서 , 소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소인의 시대가 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군자의 태도를 취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시대가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서든 군자와 소인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상황에서 군자가 되느냐 소인이 되느냐는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멋진 의사이면서, 아들의 먹거리까지 걱정하는 다정한 아버지,그의 아들이 부러운 살인마는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그 아들을 자신과 같은 지옥으로 몰아넣으려고 한다. 누가보아도 누구보다 군자다운 아버지에게 돌아 온 것은 살려준 사람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이기지 못한 자의 칼날이었다. 얼핏보면 소인의 삶이 쉬워보일 수도 있다. 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그러나 문동은과 살인마의 차이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문동은에게는 평생을 걸면서까지 되찾고자 한, ‘영광’이 있다면 살인마는 되찾고자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이 되찾고자 한 ‘영광‘은 ’존재로서의 존중‘ 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존재를 존중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전쟁 중에서도 잃지 않은 기본적인 존중, 이렇게 볼 때, 군자는 모든 존재를 그 존재로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게다가 무조건이 아닌 수준이 있는 존중 , 이처럼 문동은과 주여정이 살인마와 가해자들을 존중하는 방법은 주여정 아버지의 존중방법보다 더 끌린다. 주여정의 아버지는 성인이고, 그 아들과 문동은은 군자인건가.
여하간 바로 이 점이 ‘더 글로리’가 성황리에 종영된 것처럼,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성인보다, 주역에서의 군자가 더 매력적인 이유다.
보편적이지 않은, 상황에 따른, 수준의 차이를 둔 태도,

이렇게 3월의 두 번째 주가 지나간다. 모처럼 촉촉하게 봄비가 왔다. 곧 벚꽃이 꽃봉오리를 내 놓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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