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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죽음에 대한 태도

by 두마리 4 2023. 4. 19.

<죽음에 대한 태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지 53일째다. 병원에서 뇌 속의 피를 뽑아내는 시술을 하고 중환자실에 3주 동안 있었다. 그 뒤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숨만 쉬고 계신다.

 

아직 살아계신 어머니 동기(同氣), 외삼촌과 이모한테 전화를 했었다. 막내 이모가 말했다.

아이구 야야, 뭐 할라고 시술했노? 그 나이에 고생만 할낀데.”

 

어머니는 올해 아흔이다.

 

병원에 도착한 날, 처음에 원장하고 상담을 했다. 뇌 속의 피를 뽑아내기 위해 관을 삽입하는 시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 시술을 할 경우에 얼마나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시술을 안 할 경우에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었다. 두어 번 물으니 원장이 지금은 보호자가 그런 것을 판단할 시점이 아니고 피가 더 번지기 전에 시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 다들 기본적으로 그 정도는 하고 그 다음에 경과를 보고 판단한다고 했다. 주치의도 비슷하게 말했다. 뇌출혈 환자에 대한 경험이 없고 경중의 정도를 잘 모르기에, 전문가인 의사가 권하는 대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식이 6남매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3주가 지난 뒤에 주치의와 면담을 했다. 입원한 날로부터 나아진 게 있냐고 물었다. 중환자실에서 준중환자실로, 일반실로 옮기는 기준이 뭐냐고 물었다. 주치의가 말했다. 나아진 것은 없고, 치료 내용에 따라 환자실은 옮긴다. 돌아가실 때까지 의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병원에 있으면 치료비가 많이 나오니 요양병원으로 옮겨도 된다. 첫날 시술할 때 신중히 판단하셔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진위를 다툰다는 게 무의미하게 생각됐다. 어쨌거나 보호자에게 선택을 묻는 절차는 있었지 않았나.

 

어머니가 쓰러져 의식을 잃기 전에는 매일 전화 통화를 했다. 추석과 설 명절 때 같이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생일 때도 찾아 뵙고, 그밖에도 한 번씩 찾아 뵙고, 농사 일도 도왔다. 외식을 하기도 했고, 옛날 이야기를 묻기도 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간호사하고 하루 두 번 통화를 하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간호사가 다른 보호자는 안 그러는데 왜 자꾸 묻냐며 변화가 있으면 전화를 할 거라고 말했다. 그 다음엔 하루에 한 번 통화를 했다.

 

이제 전화 통화도 할 수 없다. 면회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할 수 있다. 찾아봬도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는데 표현을 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좀 고약하다. 먼저 어머니 당신이 어떠실지 모르겠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고 싶으실까. 의사가 자신의 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어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식사도 같이 할 수 없다. 음식을 사다 드릴 수도 없다. 꽃이 피고 져도 보여드릴 수도 없다. 계속 슬퍼하고 있을 수도 없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상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늘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이 있다. 언제라도 연락이 오면 달려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머니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생활하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2~30년 뒤에 나도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비슷한 처지로 있어야 할까.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본다. 온전하지 못한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먼저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보자. 삶이 힘들 때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해도 사람들은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산다. 프로이트도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신분학자들은 무의식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멸(不滅)을 확신한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떨까.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른들은 남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자신이 박정(薄情)하거나 사악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우리는 죽음의 우발적 원인(사고, 질병, 전염병, 고령)을 강조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태도는 죽음을 필연적인 것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 망자(亡者)에 대해서는 비난을 보류하고, 그가 생전에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악행을 눈감아 준다. ....망자는 더 이상 배려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그에 대한 배려를 진실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보다 더 중요시하는 경우도 많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솔직하지 않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삶의 필연적 결과이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인(否認)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크게 보면 자연의 순리에 따라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과 죽음이다. 하지만 인생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국면이나 과정에서 인간이 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움을 거역하는 일로 가득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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