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칼
안골양반은 젊었을 때부터 속이 안 좋았다. 찬물을 마시면 거의 탈이 났다. 안골댁은 늘 따뜻한 숭늉을 준비해야만 했다.
6~70년대만 하더라도 시골에는 거의 조선시대와 같은 가부장적 질서가 남아 있었다. 집안이 대단하거나 한미(寒微)하거나 집안 나름대로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내세웠다. 벼슬께나 한 조상을 찾아 고려시대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족보 편찬도 문중의 권위를 세우는 방법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새롭게 편찬했다. 추석과 설날에는 온 집안 남자들이 모여 집집마다 제사를 같이 모시느라 마당에 멍석을 깔기도 했다. 아침부터 시작한 제사가 저녁 무렵이 돼야 끝나곤 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벌초를 할 때도 온 집안의 남자들이 다 모였다. 가을에는 들판으로 산으로 조상 묘를 찾아다니며 묘사를 지냈다.
안골양반은 사실 그 아버지나 어머니, 형님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인근에서는 나름 부자라고 소문났는데, 둘째라고 상속받은 재산은 얼마 안 됐다. 집이 바로 옆에 붙어 있어 형님 집 농사일을 먼저 다 하고 난 다음에야 자기 집 일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부모나 형님이 자기 일을 같이 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안골양반의 형님은 읍내에서 택시 사업을 한다고 들락거렸고, 읍에 첩까지 두고 있었다. 조카들은 모두 읍내에 있는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재산을 늘릴 욕심에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고 있는 안골양반은 울화가 치밀 때가 많았지만, 어릴 때부터 배워 몸에 익은 유교 의식과 예의로 부모나 형님의 말을 거역하거나 반박하기 어려웠다.
안골양반은 스스로 노력하여 재산을 불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했다. 농한기인 겨울에도 거의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고, 노름 같은 것도 몰랐다. 자식한테는 누구보다 엄하게 대했다. 자식이 조금이라도 일을 할 정도의 나이가 되면 아침밥을 먹으면서 학교 갔다와서 해야 될 일을 일러주었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날 저녁 밥은 주지 않았다. 스무 살이 넘은 자식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꿇어 앉혀놓고 회초리로 다스렸다. 아침에 아이들을 깨울 때도 두 번 이상 부르지 않았다. 세 번째는 바로 작대기를 들고 방안에까지 들이닥쳤다.
안골양반은 불칼이었다. 목소리도 거의 쇳소리가 나는 데다 일상적인 말을 할 때도 거의 싸움을 하듯 했다. 윗어른에 대한 불만과 그것을 말할 수 없는 화가 다른 쪽으로 폭발한 것 같았다.
안골양반뿐만 아니라 시골 남정네들은 대부분 한 성질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는 형편이 빠듯하여 여유를 가질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내와 자식들한테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하기가 번거롭거나 어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마루에서 밥을 먹다가 마당으로 밥상을 집어던지는 가장(家長)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다. 동네 어느 집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가장인 아버지는 식구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 자리에서 소위 ‘밥상머리 훈화’를 했다. 그런데 이제 자식도 머리가 굵어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질 급한 가장이 ‘이노무 자슥이’ 하며 닥치는 대로 집어들었는데 아뿔싸 그게 하필 뜨거운 국그릇이었다. 가장도 워낙 급한 성질이라 그게 국그릇인지 뭔지 모르고 집어들었는데, 들자마자 국이 그만 쏟아져버렸다. 같이 밥을 먹던 식구들은 입안에 가득차 오르는 웃음의 압력으로 밥알들이 몇 알씩 튀어나오는 것을 이빨을 깨물면서 참느라고 애를 썼다. 웃지도 못하고 웃음을 참기도 어려웠다. 국그릇은 든 가장은 계속 들고 있기도 뭣하고 바로 내려놓기도 뭣한 상황이 돼버렸다.
생각해보면 밥상을 엎어버리는 행위는 식구들의 반발이나 불만을 잠재우고 가장(家長)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꽤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자식이 어릴 때 말이지, 세상 물정을 알 정도로 커버리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안골양반은 밥상을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밥그릇을 집어던질 듯한 자세를 취하는 때는 있었지만 실제로 집어던지는 경우는 없었다.
안골댁이 기억하는 안골양반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큰 아이는 등에 업고 작은 아이는 안고 땀흘리며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으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안골양반은 말없이 등에 업은 아이를 쑥 뽑아서 안고 나갔다. 손재주가 야무져서 음식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나 빗자루, 바가지, 소쿠리 등 온갖 연장들을 아주 튼튼하고 모양있게 만들었다. 안골양반이 저 세상으로 떠난 후 같이 살았던 세월만큼 혼자서 살고 있는 안골댁의 기억엔 안골양반의 칼같이 차갑고 매서웠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말없이 알아서 척척 해주던 배려와 따뜻한 불 같았던 온정만 마음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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