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2023년 2월 26일 아침
어머니가 회관에 아침 드시러 나왔다가
주저앉았다고 연락이 왔다.
오른쪽 팔다리에 힘이 없단다.
뇌출혈, 중풍(中風)이다.
박정임, 1936년 4월 14일에
경남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 내촌에서 태어나셨다.
어머니의 아버지...외할아버지는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어머니 ...외할머니는
맏딸의 둘째 아들인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
늘 허리 꼬부장하고 곰방대 물고
한결곁이 웃는 모습으로 반겨 주셨다.
지금 생각하니 희한하게도 20년 넘게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생일이 음력 8월이니 실제는 1935년에 태어나셨겠다.
1935년이면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였네.
사는 게 어려웠겠다.
어머니가 시집갈 때 동네에서 모두 부러워했다니
삼시 세끼 밥 먹는 부잣집으로 시집간다고.
어머니는 위로 큰외삼촌이 계셨고
어머니는 둘째, 맏딸로 태어나셨다.
어머니 다음에 가조 사과 과수원에 살던 어머니를 조금 닮은 큰이모
그 다음에 어머니를 많이 닮은 용산 작은이모
그 다음에 거창읍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인물 멋지고 술 좋아하셨던 둘째 외삼촌
그 다음에 내촌에 살다 읍내로 나간 잘생긴 막내 외삼촌.
1945년 광복이 되던 해
어머니는 아홉 살이었네.
1950년 6.25 전쟁이 났을 때
어머니는 열네 살이었고.
어머니는 열아홉에 내촌에서 재너머에 있는
동촌으로 시집을 오셨다.
1956년 스무살에 첫째, 아들을 낳으시고
1958년 스물 두 살에 둘째, 딸을 낳으시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어셨나.
두 살 터울이었는데, 네 해를 건너뛰어
1962년 스물 여섯에 셋째, 딸을 낳으시고
1964년 스물 여덟에 넷째, 아들을 낳으시고
1966년 서른에 다섯 째, 딸을 낳으시고
그 다음에 그만 낳으시려고 했나.
두 살 터울이었는데, 세 해를 건너뛰어
1969년 서른 셋에 여섯 째 막내 아들을 낳으셨네.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모두들 어려운 시대를 어머니도 살았다.
둘째 며느리로 들어와
엄한 시아버지
여유롭지 못한 시어머니 모시고
시형님 시샘에 고모들 눈치 보며
힘들게 사셨다.
아버지 군대 가 있을 때
혼자서 아이 키우시며
큰집 농사일 다 끝나야
우리 집 농사일을 하는데
머슴 데리고 보리타작 하러 갔을 때
보리에 싹이 누렇게 나서
억장이 무너졌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땐가
배가 고파 보리쌀 쪄 놓은 걸
조금 집어먹다가 들켜서
시어머니한테 회초리를 맞았다는 얘기도 몇 번이나 들었다.
시아버지도 워낙 사나워
칼로 생살을 가르고 소금을 뿌리듯이
매몰차고 섬찟한 말을 예사로 했다던 얘기도 몇 번 들었다.
어렵게 살면서 아버지, 어머니는
워낙 솜씨 좋으시고 열심히 사셔서
살림도 점점 피어났다.
아버지 어머니 못지않게
형님 누나들도 고생을 많이 했다.
형님, 큰누나 결혼도 시키고
살림 붓는 재미가 날 무렵
아버지는 병이 나셨고
작은누나 결혼시키고
어머니 겨우 쉰세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혼자서 30년을 넘게 사셨다.
아픈 다리를 끌고
온갖 민간 요법을 다 써보고
속이 쓰려 못 견디실 정도로 약을 쓰다가
견디다 못해 나중에
무릎 수술 양쪽 다 하시고
한 쪽에는 한 번 더 했다.
불편한 다리를 끌다시피
때로는 기어다니다시피 하시면서
끊임없이 농사일을 하셨고
간장, 고추장, 온갖 곡식과 채소
자식들한테 주고 또 주셨다.
늘 자식이 드리는 것보다
받아 오는 게 많았다.
자식 집에 오실 땐 보따리를
세 개 네 개를 가져오셨는데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오시는 거리를
초등학교도 안 나와 글자도 모르는 어머니가
어떻게 왔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
28일이 지났는데 어머니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 어머니 뱃속의 태아처럼
물속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의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