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70년대 말에 중학교를 다녔다. 면소재지에 중학교가 있었고 우리 집은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넘게 산골짜기로 들어가야 했다. 비포장 도로였고 버스는 하루에 두세 번 있었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애들이 많았지만, 등하교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고 그 시간이 아까울 때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기도 했다. 비나 눈이 올 때는 불편했다. 도로에 제법 굵은 자갈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며 자갈을 피하려다 논바닥으로 굴러 쳐박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면소재지에 있는 동네, 특히 학교 옆 동네에서 자취하는 애들이 많았다. 선생님들도 대부분 처녀 총각이었는데,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방은 학생들의 자취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시험을 치고 나면 한 번씩 불려가 채점을 해주고 따뜻한 우유를 얻어 마시곤 했다.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총애의 기쁨을 맛보았다고 할까. 아픈 기억도 있다. 국어 시간에 숙제를 안 해 간 적이 있었다. 처녀 선생님이라 얼마나 아프게 때릴까 생각했다.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았는데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너무나 아팠다. 다른 기억은 안 나고 늘 그 기억만 생생하다. 그 선생님 하숙방이 있는 집에 나도 자취를 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고향이 서울이라 했다. 서울 여자도 싫어하게 됐다.
학생들은 두 명이 같은 방을 쓰며 자취를 하기도 했다. 1학년 때는 3학년인 작은누나와 같이 있었다. 2학년 때 학교 근처에 마땅한 자취방이 없어 친구와 같이 있게 됐다. 손바닥을 어마무시하게 아프게 때린, 많이 예쁘지는 않았지만, 덩치와 키가 컸던 서울에서 온 국어 선생님의 하숙방이 있던 그 집이었다.
친구와 같이 자취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께서 반찬을 챙겨서 자취방에 한번 오셨다. 친구와 같이 한다니까, 어떤 곳인지 확인차 오셨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당장 방을 옮기라고 하셨다. 학기 중이라 자취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주인집 아주머니께 말하니 안채에 붙어 있는, 안 쓰던 뒷방을 하나 내어 주셨다. 바로 앞에는 영어 선생님의 방이었다. 내 방과 선생님의 방 사이에는 벽지를 발라 고정시킨 미닫이 문이 하나 있었다. 작은 소리도 다 들렸다. 방에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그 영어 선생님도 무척 불편했으리라. 안 쓰던 방이라 이불을 덮고 자고 있으면 발가락 끝으로 쥐가 왔다갔다 했다. 처마 밑 쪽으로는 장판도 안 깔렸고, 천장도 컴컴했고 서까래가 노출되어 박쥐가 몇 마리 붙어있기도 했다.
그 뒤로도 어머니께서는 왜 방을 옮기라 했는지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다. 나도 선택적으로 예민하고 대체로 무덤덤해서 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한참 오래된 후에 문득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머리카락이었다. 어머니가 방 청소를 했던 기억이 났다. 친구와 같이 자취를 한다고 해서 와봤는데 여학생의 머리카락이 나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친구 때문에 자취방에 여학생들이 들락거린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어머니가 오시기 며칠 전에 나한테 찾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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