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과학이고 망각은 예술이다
우리는 망각보다 기억에 더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기억은 경험이고 지식이다. 기억력은 똑똑함이고 명철함이고 치밀함이고 능력이 된다. 반면에 망각은 우둔함, 바보, 무지(無智), 건망증(健忘症), 치매(癡呆), 무능력과 연결된다. 우리는 기억을 잘 하려고 애를 쓰지, 망각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경우는 드물다. 기억은 의식적이고 망각은 무의식적이다. 기억은 과학이고 망각은 물리적 실체 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기억이 유(有)라면 망각은 무(無)다. 기억의 뒷면이 망각이기에, 망각을 담당하는 뇌 부위를 찾을 수 없으리라.
『기억의 뇌과학』(리사 제노바)은 기억은 과학이라고 말한다. 해마라는 부위가 기억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기억은 해마에서 최초의 경험을 접수한 시각피질, 후각피질, 지각피질 등 각 부위로 배분된다. 기억은 신경세포 집단의 신경망 형태로 머릿속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실체다. 기억을 인출할 때 MRI로 촬영하면 번쩍거리면서 머릿속을 뒤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기억을 몇 가지로 분류한다. 작업기억ㆍ근육기억ㆍ서술기억ㆍ명시적 기억ㆍ의미기억ㆍ일화기억ㆍ장기기억ㆍ섬광기억ㆍ자서전적 기억ㆍ재인기억ㆍ친숙기억 등의 용어가 나온다. 작업기억은 15~30초 동안 머무는 순간적이고 찰나성의 시공간 메모장이다. 반복하면 장기 기억으로 넘어간다. 근육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소환되는 기억이다. 일정 동작을 반복하면 근육도 단련되지만 그 부위를 담당하는 뇌 부위도 커진다. 서술기억ㆍ명시적 기억ㆍ의미기억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이다. 일화기억은 일어난 일, 장소, 시간과 묶여있는 기억이다. 섬광기억은 충격적이고 굉장히 의미 있으면서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경험들에 대한 일화기억이다.
기억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나온다. 반복, 주의집중, 끊어서 외우기, 음운루프로 변환하기, 스스로 묻고 답하기, 의미 부여하기, 공간을 이용하여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 기억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는 방법도 나온다. 해야 할 일을 적어두기, 달력에 메모하기,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 안 보일 수 없는 장소에 단서를 배치하기, 평소와 다른 일과에 주목하기.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느끼는 나이가 되면 대부분 하게 되는 것들이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는 맥락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내가 뭘 하려고 여기 왔더라?’ 그런데 문을 열고 다른 세계를 보는 순간, 그 전 세계를 잊어버린다.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다른 세계가 펼쳐져, 냉장고 문을 연 목적을 잊어버린다. 일시적이고 적절한 긴장과 스트레스는 기억형성에 도움이 되지만, 관리되지 않거나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기억에 독이 된다고 한다. 충분한 잠은 기억력 강화에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채식 위주의 식단과 적당한 운동과 공부가 기억력 유지에 좋다고 말한다.
기억은 왜곡되고 변형되기도 한다. 정확하다고 100퍼센트 확신하는 생생한 기억이 100퍼센트 틀린 기억일 수 있다. 세세한 부분은 빼먹고, 어떤 부분은 재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왜곡한다. 일화기억은 단어의 선택과 유도질문으로 쉽게 조작된다고 한다. 수사로 증거를 조작할 수 있는 수법을 짐작하게 한다. 미국에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DNA 검사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2019년까지 365건이나 있다고 한다. 일본 영화 ‘라쇼몽’을 보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각각 다르게 사건을 기억한다. 감각경험을 언어로 전환하면 원래 기억이 왜곡되고 축소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도 있다. 다른 정보가 원래의 기억을 부풀리는 ‘작화증’이 작용하기도 한다. 입장에 따라 의도적인 왜곡도 개입한다.
기억이 망각보다 좋기만 할까. 과잉기억증후군이 있다. 이별ㆍ죽음ㆍ그동안의 실수들ㆍ후회 모멸의 매 순간ㆍ 최악의 기간ㆍ가장 고통스러운 날들이 선명하게 기억나서 괴로운 경우다. 오늘 주차한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제 주차한 장소는 잊는 게 좋다. 새로운 비밀번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전 비번은 잊는 게 좋다. 한 가지에 집중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잊어야 한다. 의미 있고 유용한 정보는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야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이다. 옛날 애인에 대한 기억은 새로운 애인을 만나고 기억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망각은 중요하고 우리를 살게 하는 면도 있다.
서양에서는 니체 이전에는 망각보다 기억을 중시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기억에 의해 발견된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의미하는 ‘일레테이아’가 망각의 강 ‘레테’를 ‘거슬러 가는’ 운동 즉 기억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피히테도 기억이 없다면 세계도 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다면, 나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십 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아야, 십 년 전의 앉았던 그 벤치가 오늘의 그 벤치로 기억될 수 있고, 그러한 기억이 나의 세계가 된다.
니체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으며 망각의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가 말한 ‘낙타’는 기존의 제도나 규칙 등을 모두 짊어지고 과거 기억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상징하고, ‘사자’는 자신을 제외한 어떤 것도 짐으로 지지 않는 자유정신을, ‘어린이’는 자신마저 망각하고 새로운 세계를 획득하고 창조하는 정신을 상징한다. 들뢰즈도 망각의 힘으로부터 생성의 존재론을 구축해야 된다고 말한다. ‘자의식’은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아야 형성된다. 자의식이 강할수록 세계와의 새로운 연결은 힘들 수밖에 없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공(空), 허(虛), 무(無)를 강조했다. 기억보다는 오히려 망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도덕경』에 보면,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지며,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른다’, ‘그릇의 텅 빈 공간이 있어서 그릇의 기능이 있게 된다’, ‘유(有)는 이로움을 내주고, 무(無)는 쓰임(기능)을 하게 한다’. 무위자연은 무지(無知)의 태도로 어린애처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에도 ‘성인에게는 앎이 화근으로, 규약도 아교풀로, 얻음도 사람 사귐으로, 솜씨 부림도 장사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성인은 꾀하는 일이 없으니 앎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말한다. 니체와 들뢰즈의 생각이 이와 흡사하다. 니체와 들뢰즈도 노자와 장자를 읽었으리라.
기억도 중요하고 망각도 중요하리라. 무(無)에서 유(有)가 생기고 그 유(有)를 덜어내고 비우면 무(無)가 된다. 그릇을 채워야 비우고, 비워야 다른 것을 또 채울 수 있다. 음식을 먹어야 배를 채울 수 있고, 소화를 시켜 속을 비워야 또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있음은 이로움을 주고 없음은 쓰임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대체로 기억하고, 채우고, 소유하는 삶을 더 중시하면서 산다. 그 반대로 잊고, 비우고, 소유하지 않는 삶도 꼭 그만큼 중요한데, 그것을 잘 하지 못해 생기는 병폐가 많다. 그래서 노자나 장자ㆍ니체ㆍ들뢰즈의 말을 들으면 깨달음이 일어나고 삶을 반성하게 된다.
-『기억의 뇌과학』(리사 제노바)를 읽고
'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 > 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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