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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차별과 욕망, 속죄와 화합

by 두마리 4 2023. 1. 28.

20218월에 아프간 난민 400여 명이 국내에 들어왔다. 그 중 157명이 울산의 동구에 정착을 했다. 난민의 학생들이 인근 학교에 배정되었다. 지금은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일부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 학부모들의 주장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하라.” “왜 우리 아이들이 희생해야 하나.” 이질적이고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그 학부모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학부모들은 그것을 단지 적극적으로 드러냈을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우리는 어떤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것의 이름을 말한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분별(分別)이고 식별(識別)이다. 어떤 것을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다른 것을 나누는 것이다. 인식을 위한 나눔은 차별의 시작이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본질과 더 멀어지기도 한다. ‘이주민이다, ‘난민이다 이름을 붙여 말을 해야 구별하여 인식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든 그 본질을 온전히 나타낼 수는 없다. 그래서, 라울 프랑세는 식물에 대한 린네의 명명이 식물의 생명력을 잃게 하고, 노자는 말을 하면 늘 그러한 것이 아니게 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 분별을 아예 하지 말자고까지 한다.

 

사람들은 인식한 다음에 가치 판단을 하여 더 나눈다. 참인가 거짓인가, ()한가 악한가, 아름다운가 추한가, 이로운가 해로운가, 성스러운가 세속적인가, 동지인가 적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난민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태도를 갖는가? 난민은 참이고 선하고 아름답고 이롭고 동지라고 여기는가? 그렇지 않은 쪽이 더 많을 것이다.

 

연을 쫓는 아이(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간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욕망과 차별, 속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아미르의 아버지 바바는 귀족이다. 바바는 하인 알리의 아내에게서 아들 하산을 얻는다. 그 사실을 숨기면서 속죄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들한테와는 다른 방식으로 동등하게 잘하고 어린이집 운영 등의 자선 사업을 한다. 아미르는 귀족이고 하산은 하인이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연싸움 대회에서 아미르가 우승을 하고, 마지막까지 경쟁하다 줄이 떨어진 연을 하산이 쫓아가서 줍는다. 하산은 아미르에 연을 갖다주기 위해, 초지일관 더할 수 없이 나쁜 놈인 아세프일당에게 능욕을 당하고 상처를 입는다. 아미르는 하산을 찾으러 갔다가 그 장면을 보고도 도망을 친다. 아미르는 연싸움 대회에서 우승하고 마지막에 떨어진 연을 가져, 아버지와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게 되지만 하산에 대한 일로 지워지지 않는 죄의식을 갖게 된다. 미국에 정착하여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미르는 그 속죄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천신만고 끝에 하산의 아들 소랍을 구출하고 자신의 아들로 입양한다.

 

인간은 평등을 바라기보다는 차별을 욕망하는 것 같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끊임없이 신분과 계급을 나누고 차별한다. 차별화하고 그에 따른 능력, 지위와 권력, 품위 등을 인정받기 위해 경쟁한다. 공자가 말한 애인(愛人)’에서 ()’은 지배층인 귀족이다. 피지배층의 백성은 ()’이다. 귀족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백성은 부려야 할 대상이다. 엄밀히 말해 귀족만이 사람인 것이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을 쫓는 아이에서도 귀족인 바바와 아미르는 그들의 귀족 신분에, 알리와 하산은 그들의 하인 신분에 따른 권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계층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옛날과 달리 현대 사회는 대부분 신분제 사회가 아니다. 하지만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 남들과 차별화되기를 욕망한다. 아프간 난민에 대한 시각에도 이런 차별 의식이 깔려 있다. 평등과 공평은 약자들의 희망 사항이고, 정치가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말로만 평등을 외친다.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서 죄의 성립 여부와 형벌도 달라진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 귀족에게는 예()를 요구했고, 형벌(刑罰)은 피지배계층인 민중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양반과 노비의 죄와 형벌은 달랐다. 아프간에서 탈레반 무리는 함부로 사람들을 쏘아 죽여도 죄가 안 되지만, 일반 사람들은 탈레반을 오래 쳐다만 봐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대부분 신분제가 아니고 법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경제력과 지위에 따라 죄와 형벌의 경중이 달라지는 것 같다.

 

인간의 욕망은 차별을 더 지향한다. 그래서 한 국가 안에서 평등과 화합은 자유만큼 이루기 어렵다. 하지만 분별의 본질을 이해하고, 대립과 갈등을 줄여 공동체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구성원 모두가 법 이전에 먼저 양심에 따라 노력하고, 법적인 처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계층은 바바와 아미르 같은 속죄 의식을 가져야 한다. 현대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강자가 평등과 공정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연을 쫓는 아이』(할레드 호세이니)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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