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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가부장을 넘어 새로운 질서를 꿈꾸다

by 두마리 4 2023. 1. 15.

주인공 슬아는 작가이다. 아버지 웅이는 슬아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직원이다. 슬아는 마감 시간이 다 돼 가는데 글이 잘 안 쓰여져 수심에 차 있다. 그런 슬아를 아버지 웅이가 위로한다. “걸으면서 심호흡도 하고……그렇게 차분히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책상 앞에 들어오면 딱 ……이런 생각이 들 거야.” “어떤 생각?” “씨바, 그냥 아까 쓸걸.” 가녀장 시대(이슬아)를 읽으면서 킥킥거렸던 부분이다.

 

단어를 조금 틀리게 말하는 복희의 오류도 키득거리게 만든다. “자기야, 안경 쓰니까 인테리어 같다.” “어제 뉴스 보니까 트렁크 대통령 걔 진짜 미쳤더라~” 해학(諧謔)이나 웃음은 부조화, 비상식, 비논리의 영역에 더 많다.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적절한 말이나 행동은 별로 웃기지 않는다. 아재 개그도 논리적 오류이다. 일반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솔직하고 과감한 말도 웃긴다. “피디님도 유두가 있으시잖아요. 제 유두만 특히 더 가려야 하는 이유가 뭐죠?” “스님 정말 …… 머리통이 너무 예쁘시네요.”

 

씨바’, ‘존나라는 욕도 재미를 유발한다. 추임새 같다. “이거 안 붙이면 어쩔 건데, 씨바?” “다 썼다, 쒸발!” “…… 존나 맛있네.” 특정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욕설이 아니다. 자기 감정을 강조하거나 감정을 배설하는 쾌감을 드러낸다. 불필요한 고정 관념에 대한 도발도 함께 묻어 있다.

 

주인공 슬아의 캐릭터가 참 매력적이다. 말이 솔직하고 담백하다. 군더더기 없이 정곡을 찌른다. “세 보이려는 타투는 오히려 더 약해 보여요.” 엄마 복희가 오십대는 나밖에 없더라. 다 젊고 예뻐라고 말하니까 개네들도 나중에 늙을 거야.”라고 말한다. 복희가 이제 나도 기도하려고 하니까, “누구한테 하게?”라고 말한다. “일단 자기 자신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자기 자신이랑 헤어질 수는 없잖아.” 등과 같은 말도 간결하게 정곡을 파고든다.

 

일상적인 소재가 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슬아와 복희의 팔씨름을 설명하면서 운동 근육보다 생활 근육의 중요함을 슬쩍 내비친다. 슬아의 강연 준비 과정을 설명하면서 청중을 대하는 강연자의 치밀함과 성실한 자세를 드러낸다. 데이팅을 통해 관계 맺을 때의 절제를 말한다.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을 가리지 않고 하다보니 어느새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아진 사람이라고 웅이(슬아 아버지)의 직업 이력을 통해 직업에 대한 가치관을 내보인다. 또 근처 절에 다니게 된 일을 통해 기도와 수련의 가치를 말한다.

 

생뚱맞게 느껴지는 한자 어구와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도 작가의 주제의식을 표출하는 장치다. 부생아신(父生我身), 모국오신(母鞠吾身) ‘아버지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 내 몸을 기르셨다.’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말은 마치 ~인 듯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서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말 속에 배어 있는 질서와 권위를 말을 통해 반항하는 작가의 의지를 볼 수 있다. 가부장(家父長)이 아닌 가녀장(家女長), 부모(父母)가 아닌 모부(母父)라고 쓰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방황이나 갈등을 겪을지라도 가부장 질서의 권위를 부정해보겠다는 작가 의식도 읽을 수 있다.

 

역설(逆說)적 인식도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글쓰기에 관해 천재가 아닌 아이는 없었다. 동시에 계속 천재인 아이 역시 없었다.” “기쁨 곁에 따르는 공포와, 절망 옆에 깃드는 희망 사이에서 계속되는 사랑을 존자씨와 병찬씨를 통해 본다.” “폴 발레리가 그랬어요.” “작품을 완성할 수 없대요.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 뿐이래요.” “주인이란 달콤하고도 피곤한 것천재와 둔재, 절망과 희망, 완성과 미완성, 달콤함과 피곤함, 가장과 가족, 삶과 죽음……어느 한쪽을 부정하고 다른 한쪽만 말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과는 다른 맛이 있다. 전통적인 소설에 볼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에 대한 묘사적 설명이 거의 없다. 간결하고 담백하게 사건이 진행된다. 그래서 지루할 여지가 없다.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보는 것 같다. “지금까지 제가 쓴 것이 문학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문학이 아닐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문학, 소설의 새로운 범주를 추구하는 작가 의식을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가부장(家父長)에 대응해 가녀장(家女長)을 쓰고, 가부장적 질서와 권위를 부정하는 면이 있다. 가장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수직적이고 일관된 질서를 부정한다.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를 바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이 가장 큰 사람이 가장이 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기업은 그렇지 않은가! 동성 부부 이야기를 보면, 남자 역할이든 여자 역할이든, 가장 역할이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일의 효율에 따라 정하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은 타자(他者)와의 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사랑해주고 인정해주고 고독을 달래주며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얻은 자유는 침해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이다. 딸 슬아와 어머니 복희, 슬아와 아버지 웅이, 복희와 웅이, 슬아와 그 친구 미란, 딸과 그 데이트 상대방의 관계를 보면 그 적절한 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정답은 없다. 문제가 생기면 그 거리의 적절함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가녀장의 시대(이슬아)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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