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퀴블러 로스라는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니까, 마지막엔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아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더구나 그 미래를 바꿀 수 없다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드라마 ‘아웃랜더’에 보면, 과거 시대로 가 살면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의 괴로움이 나온다. 의학이 발달하여 생명의 남은 기한을 예측할 수 있지만, 미래를 아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어령은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라스트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사후 책으로 나온 것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다. 이어령은 말을 아는 것이 많고 말을 잘하여 마지막 남은 인생에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어령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천재이고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박학다식하다. 저서도 200여 권에 달한다. 또한 스스로도 지적인 순발력과 상상력, 폭넓은 지식 세계, 초인적인 영성까지 감추지 않는다. 그래서 교만해보이기까지 한다. 언어기호학자, 언론인, 비평가, 소설가, 시인, 행정가, 크리에이터 등에 전문적인 능력을 보였다. 인터뷰의 내용에 등장하는 학문 분야도 철학, 심리학, 윤리학 등 인문학은 물론이고 뇌과학, 인공지능, 유물론, 화학물질론, 수학, 양자역학(파동, 입자), 미술, 음악 등 광범위하다. 내용을 인용하는 책들도 다양하다. 『꿈의 해석』, 『우상의 철학』 (프로이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스토옙스키), 『광장』(최인훈), 『은유로서의 질병』(수전 손택), 『죽음 앞의 인간』(필립 아리에스),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레마르크), 『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 『밤과 안개』, 『죽음의 수용소』(빅터 프랭클),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이성비판』, 『이솝우화』, 『플라톤의 대화』, 『탕자, 돌아오다』(앙드레 지드), 『필록테테스』(소포클레스-고통과 신궁), 『악의 꽃』(보들레르), 『감옥의 역사』(푸코), 『마농 레스코』(아베 프레보) 등이 나온다. 언급되는 사람들도 많다. 퀴블러 로스, 테레사 수녀, 니체, 제임스 와트, 토마스 뉴커먼, 고흐, 프로이트, 프랜시스 베이컨, 욥, 소크라테스, 보들레르, 하이데거, 플라톤, 데카르트, 이지함, 알렉산더, 디오게네스, 사르트르, 김승옥, 백남준, 데이비드 데스테노, 노자, 장자, 오디세우스,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이어령은 어떻게 박학다식한 천재가 되었을까? 보통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들이 대부분 타고난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듯이 이어령도 인정하지 않는다. 도올 김용옥도 스스로를 ‘돌대가리’라고 한다. 얄밉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어령이 삶은 운명적인 것 70%, 자유의지에 달라지는 것이 30%라고 한다. 명리학의 오랫동안 공부한 강헌도 70%, 30%를 말했다. 비율이 같은 점이 신기하다. 아무튼 천재도 자유 의지에 따라 엄청나게 노력해서 그에 따른 발전과 변화임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스스로는 둔재(鈍才)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이어령을 똑똑하게 만든 것은 의문(疑問)을 가지는 태도이다. 의문은 세상일에 대한 호기심이고 관심이다. 물음을 통해서 구하는 자세는 『주역』 몽괘(蒙卦)에도 나온다. 몽매한 자 즉 교육을 받는 자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논어』 술이편에도 이와 상통하는 내용이 나온다.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되,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않으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기존 지식과 관념에 대한 반박과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어령은 학생 시절에, 들에 쓰러져 자는 주인을 산불로부터 구하기 위해 털에 물을 묻혀서 주인을 적셨다는 충견(忠犬)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면서 따박따박 따지고, 지혜의 본보기로 우리가 들었던 솔로몬의 재판도 말이 안 된다고 비판하고,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혼잣말도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스스로 좌뇌적이기도 하면서 우뇌적이기도 하다는 점, 엄청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하는 면도 있지만, 어지럽게 널려 놓기도 한다는 점 등도 세상에 대한 멈출 수 없는 호기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태도가 축적되고 발전하여 지식의 세계가 넓어졌으리라. 본인은 초월적이고 영적인 능력이라고 말하는 점도 근본적으로는 의문을 가지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미나리꽝에서 개구리가 엄청난 소리로 와글와글 울어대는데 돌멩이 하나 던지니까 면도날로 자른 듯이 소리가 끊기면서 찾아온 정적이 너무나 신기해서 형이 부르는 것도 모르고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 88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 이미지도 그러한 직관에서 나왔다는 이야기. 글을 쓸 때 마지막에 영감(靈鑑)이 느껴져 들춰본 어떤 책의 구절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이 달라졌다는 이야기 등도 그 바탕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지적인 관심과 관찰의 태도가 안 좋은 점도 있다. 바로 연애이다. 연애에 관한 경험담은 좀 충격적이다. 좋아하던 여학생이 전차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하면서 자신과 몸이 부딪혔을 때 느낀 고양이 같거나 자벌레 같았다는 육체성 때문에 연애 감정 싹 가셨다는 이야기. 반대편 전차의 한 여학생과 우연히 눈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순간의 경험, 백화점 로비에서 장난감 말을 타고 있을 때 무서워 울면서 자신의 눈을 바라보았던 예쁜 소녀 이야기를 가장 순수하고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이어령은 말한다. 이런 이어령이 일반적인 연애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든지 지적인 매력이 폭발하는 ‘뇌섹남’이라, 무딘 연애 감정을 다 덮고도 남았으리라.
어원에 대한 생각과 해석도 호기심에서 출발했으리라. 말에 대한 어원이나 개념 정의는 글을 시작하는 실마리로도 많이 쓴다. 어원적 개념은 흥미를 주기도 하고, 본질을 생각하게 만들어 어떤 때는 참신하기까지 하다. discover; cover를 벗는 것이 발견. interview; 사이에서 보는 것. cancer; 캔서는 라틴 말로 ‘게(crab)’이고 암은 게가 내 몸에서 기어다니고 웅성거리는 것. company; com이 함께고 pany가 빵이니 회사라는 말도 한솥밥 먹는 공동체. interest; 관심, 재미 외에 이익, 이자라는 뜻도 있어 이익을 내려면 관심, 흥미가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rival; 어원이 리버 river, 강물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가 서로 사이가 나빠… 라이벌은 상대를 죽이면 나도 죽고 상대가 있어야 내가 발전한다는 이야기. 이런 태도가 노견(路肩)을 ‘갓길’로 바꾸고,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이라는 조어(造語)와 그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언어기호학자로 발전하게 만들었으리라.
세상일에 대한 의문은 결국 역설(逆說)적 인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역설은 초월이고, 그것은 창조로 이어진다. 이어령의 역설적 인식과 그 생산성에 관한 생각이 곳곳에 나타난다. “진실보다 거짓이 생존할 때가 많아. 감추고 싶은 진실은 많지만, 거짓은 감출 이유가 없다. 진실을 덮기 위해서 거짓은 만들어지니까.” “눈 내린 장면은 아름다운 쿠데타! 눈은 고요하게 내리는데 ‘펑펑’ 내린다고 한다.” “신념에 기대 사는 건 시간 낭비라네. 말 그대로 거짓이야.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와야 하네.”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해…그게 선이든 악이든 일단 나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 거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신에 가까운 자유의지를 갖게 된 거야.” “유럽에서 창녀, 깡패, 죄수들을 전부 배에 태워 미국으로 쓸어 보내잖아… 미국은 쓰레기 취급받던 인간들이 함께 모여 성장한 거야.”
‘감추고 싶은 진실은 많고…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은 만들어진다.’는 말은 섬찟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대부분은 그 진실은 드러나고 일부가 거짓에 의해 왜곡된다고 여겼는데, 실상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진실을 덮기 위한 거짓말들이 각종 언론매체에서 난무하고, 그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실제의 사건, 즉 하나의 진실이 만들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신념은 거짓이고, 꿈은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일탈과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된다는 말도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는 역설이다. 신념은 투철해야 하고, 꿈은 이루어져야 하고, 일탈이나 길 잃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태어나면서부터 ‘신념’을 가진 자도 없고, 날 때부터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아는 사람도 없다. 부모든 사회든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념이고 길이다. 어느 때, 어떤 계기로 형성된 하나의 신념과 길을 고수(固守)하면, 벽이 만들어지고 단절과 불통이 시작된다.
역설은 모순이다. 논리나 상식에 맞지 않다. 인간 만사에 모순이 생기는 원인은 인간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에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신과 생물의 중간자로 인간이 있기에, 인간은 슬픈 존재고 교만한 존재. 양극을 갖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순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 공감한다. 그러나 환자가 많을수록 의사나 간호사의 존재 가치가 높아지고, 범죄자가 많을수록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의 사회적 위상과 권력이 높아지는 현실의 모순 앞에서는 막막해진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의사가 없고 검사나 변호사가 없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가 더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환자도 범죄자도 없을 테니.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역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삶의 ‘마지막’ 수업이고, ‘라스트’ 인터뷰라서 그럴까. 따지고 보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삶 없이 죽음을 말할 수 없고, 죽음 없이 삶을 말할 수 없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죽을 일이 없고, 죽지 않으면 삶의 문제를 말할 필요가 없다. 삶의 모든 의미, 가치, 욕망 등은 죽음을 전제로 말할 수 있다. 죽지 않으면 그것은 신(神)이고 완전하고 영원불멸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대상의 정체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 대립적인 개념이나 그 대상이 아닌 것을 생각하는 방법은 매우 유용하다. 삶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죽음’이나 ‘삶이 아닌 것’을 생각해보면, 삶의 본질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이란 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바른말을 한다는 말 등은 이러한 맥락을 보여준다. ‘남자’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여자’나 ‘남자 아닌 것’을 생각해보면 그 정체가 분명해진다.
문학 작품을 해석할 때도 이러한 접근은 유용하다. 예를 들면, 윤동주의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를 해석한다고 해보자. ‘죽는 날’에 대립되는 말은 ‘사는 날’이다. ‘사는 날까지’로 바꿔도 의미 차이가 없다. 삶이 끝나는 날이 죽는 날로서, 삶과 죽음이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의미는 대립되는 ‘땅’이나 ‘하늘이 아닌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땅을 우러러’? 말이 안 된다. ‘땅을 굽어’라고 바꿀 수 있지만, 땅을 굽어보면서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땅이 아닌 다른 것을 넣어 볼 수 있다. ‘하느님/예수님/부처님을 우러러’ 말이 된다. ‘부모님을 우러러’도 말이 되지만 좀 어색하다. ‘하늘’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판단해주는 절대자인 것이다. ‘부끄러움’의 의미도 대립되는 ‘자랑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이 아닌 ‘슬픔’, ‘기쁨’, ‘분노’ 등을 생각해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와 다른 감정을 느낄 때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그 의미가 정리된다.
이어령도 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실토한다. “글이 안 써져. 읽을 수도 없고. … 그게 죽음이야. 내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더군. … 암세포는 내 몸의 지우개. …공백이야.” 그러다 지워지지 않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한 줄 두 줄 쓰면서 영성으로, 사후에도 길이 남을 자신의 글을 생각하며 그 공백을 극복해내고 마지막까지 활동을 하게 된다.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날로 심해지는 기후 위기 탓일까.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 > 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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