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3일 양구군 국도의 싼타모 승용차 안에서 남녀 4명이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1명은 숨진 채로 발견됐고, 나머지 3명은 중태다. 지난 8일에는 정선군의 한 민박집에서 남녀 4명이 연탄불을 피워 놓고 함께 숨졌다. 15일엔 횡성군의 한 펜션에서 5명이 연탄불을 피워놓고 동반 자살을 시도해 1명이 중태에 빠졌다. 17일엔 인제군 휴게소 카니발 승용차에 남녀 3명이 동반 자살했다.
요즘도 자살 사건은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31일의 기사에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생중계한 10대와 20대의 여성 2명이 구조됐다는 내용도 있다.
2023년 현재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위다. 2022년에도 1위였다. 수년 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통계청의 2022년 사망원인 분석을 살펴보면 고의적 자해(자살)로 사망한 인원은 1만2906명, 10만명당 자살률 25.2명이다. 수치만 놓고 보면 2018년 26.6명에서 내림 곡선을 보이고 있지만 OECD 국가 평균이 10.6명이라는 사실과 견주면 2.4배에 가깝다.
한국에서 처음 살해 후 자살의 실태를 연구한 2022년 한국심리학회지 게재 논문 ‘국내 살해 후 자살의 현황과 특성’에도 경제적 원인에 따른 가족의 공멸 상황이 분석돼 있다. 이 논문은 ‘경찰 수사기록을 통한 자살사망자 전수조사’ 자료를 이용해 2013년부터 5년 동안 벌어진 살해 후 자살 269건을 분석했는데, 가족·동반자 살해 후 자살로 분류된 242건 가운데 ‘경제 문제’가 포함된 사건은 41.7%(101건)나 됐다.
구광렬의 소설 『자살 카페』는 청소년들의 동반 자살을 다루고 있다. 동반 자살에 관한 사건 기사가 창작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에서 동반 자살에 가담한 명수, 준혁, 주택, 미진, 혜경, 영욱, 현아, 슬기는 모두 청소년이다. SNS를 통해 함께 자살할 사람들을 모으고 자살 방법과 장소와 시간을 정한다. 자살을 말리려는 준혁은 교수와 친구에게 생중계를 하다가 자살을 도와주는 동반자에 의해 자신도 죽게 된다. 왜 자살을 할까? 귀농 실패로 인한 빚더미, 수능 성적 비관, 취직 실패로 인한 생계곤란과 우울증,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성폭행 등아 이유로 나온다. 작품 속 영욱이란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불평등만 있어도 살지. 헬조선에 어디 불 자 붙은 게 한둘인가. 불의, 불공정, 불법…… 있는 자는 더 있게 되고…… 있는 마음껏 쓴다지만 늑대에게 무한한 자유는 양들에겐 죽음일 뿐이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진 완전 계급사회. 신분사회. 거역하면 왕따. 개천에서 용 안 나와. 미꾸라지만이라도 나오면 좋겠는데. 지렁이만 나오지. 아니, 미꾸라지 정도는 나오는데, 지렁이로 간주하지.”
우리나라의 초등학생 자살율도 세계적으로 높다. 고등학생의 수능 성적에 대한 비관은 물론이고, 초등학생인데도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엄청난 경쟁이라고 한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78명이다. 지금은 더 떨어져 0.6명대로 떨어지기 직전이라고 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1위에서 신기록을 계속 갱신하고 있다. 저출산의 원인은 자살의 원인과 맞닿아 있다. 부모의 능력, 극한적인 경쟁, 점점 벌어지는 빈부격차, 돈과 권력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와 공정과 합법이 그 원인이다.
동반 자살하러 펜션으로 간 일행에서 낙오된 주택이가 분식점에서 라면을 먹다가 모 국회의원의 아들이 불과 28세의 나이에 회사로부터 퇴직금을 무려 50억원이나 수령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이런 뉴스를 들으면서 또 이런 사건들을 합리화하는 언론과 죄가 안 되게 만드는 권력을 보면서, 별 가진 것 없는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싶겠는가. 40년, 50년 상환으로 수 억씩 빌리고 영끌해서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을까.
자살예방센터도 있고, 정신건강복지센터도 있다. 학교에서는 상담사가 자살 예방을 위한 설문과 상담 등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도 해가 더할수록 자살은 늘어가고 있다. 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류멸절의 시기를 예감해서 본능적으로 자살하고, 출산도 적게 하고 있는가.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조사나 상담이 무용한 것은 아니지만 자살을 줄이는 데는 별 효과가 없다. 자살 원인을 없애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출산에 대한 대책이 별 효과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출산의 원인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대부분 살리려고 한다. 살리는 게 정말 잘 하는 일일까.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을 있다. 정말 그럴까. 이승과 저승을 비교할 수 없기에 알 수 없다. 그래도 살고 싶은 사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차라리’ 죽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죽어서 자신들만 살아남은 세상이 될까봐 하는 말이 아닐까. 자살하는 사람을 살리고 자살하지 않게 하려면, 자살의 원인을 줄이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학벌이나 부모의 지위에 상관없이 큰 차이 나지 않는 임금으로 보통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 살인적인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면서 자살을 말려야 한다.
소설 속에서 시나리오 창작 교수가 말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임산부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임신할 필요가 있다고 했어. 에밀 졸라는 부두 노동자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근 한 달 가까이 출근길을 지켜보며 관찰했고....<기생충>, <브로커>, <헤어질 결심> <오징어 게임> 등 세계적으로 히트 친 작품들의 공통점이 뭐야? 디테일이야”
한 학생이 질문한다.
“자살하려는 사람의 심리를 묘사하려면 자살해봐야 합니까?”
모든 것을 다 체험할 수 없고, 체험한다고 반드시 디테일하게 묘사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디테일한 묘사에 체험은 중요하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국회의원들이 일 년에 한 달은 육체 노동을 하고 그 임금으로만 한 달 생활을 해봐야 한다고.
-『자살 카페』(구광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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