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수풍정괘(水風井를卦䷯)를 쓰기 위한 밑밥
6~70년대만 해도 시골 마을에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거의 마을 한 가운데쯤 큰 우물이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공터도 우물 근처에 있었다. 아이들은 주로 그 공터에서 놀이를 했다. 공터 옆으로 동네 위쪽 산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개울물이 있었고 거기엔 공동으로 쓰는 큰 빨래터가 있었다. 우물과 빨래터, 공터가 있는 공간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우물은 주로 동네 아낙네들이 많이 사용했다. 우물가에서 쌀이나 나물을 씻었다. 집안에서 쓸 물을 동이에 이고 가기도 했다. 동네 아낙네 중에는 물동이를 이고 가는 데 달인이 된 분도 꽤 많았다. 물동이를 이고 두 손을 안 잡는 것은 물론 거의 뛰다시피 다니는 분도 있었다. 동네에 떠도는 소문이나 좋거나 나쁜 이야기들이 우물가에서 오고갔다. 식구들이 모여 밥 먹는 자리에서 우물가에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어머니가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 어머니는 이야기 당사자의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전했는데, 그게 무척 재미있었다. 품앗이를 구하거나 서로 도움을 요청하고 주는 일도 우물가에서 이뤄졌다. 남정네들이 우물을 사용할 때는 쇠죽 끓일 물을 퍼오거나 집안에 잔치가 있어 물이 많이 필요할 때였다. 양쪽에 물통을 매단 물지게를 썼다. 물지게를 처음 메었을 때 물이 출렁거려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고, 집에까지 가는 도중에 물이 많이 쏟아져 물통에 반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근대화가 되면서 동네 뒤쪽에 큰 물 저장고를 만들고 파이프를 묻어서 집집마다 물이 들어오게 하는 수돗물이 생겼다. 공동 우물을 사용하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다 겨울에 파이프가 얼어터지는 등 저수 장치나 배관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이럴 때면 우물을 다시 쓰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안 쓰던 공동 우물의 물을 다 퍼내고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상수도가 없을 때 마을의 공동 우물은 매우 중요했다. 좋은 우물이 없다면 마을을 형성하기 어렵다. 서양에서도 우물은 중요했을 것이다. 서양 논리학에 ‘우물에 독 뿌리는 오류’가 있다. 원천 봉쇄의 오류다. 정치인들 중에 가끔 이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있다. 몰라서 범한다기보다 오류인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러는 경우가 많다. 얘기도 하지 말고, 협력도 하지 말자는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물은 집집마다 배관으로 공급된다. 집 안에서도 주방, 화장실, 베란다 등으로 다시 연결되어 어디서든 꼭지만 틀면 물이 나온다. 취수(取水)하는 마을의 단위가 커졌다. 몇 십만, 몇 백만 명이 먹을 물을 한꺼번에 모아서 정수(淨水)하고 펌프질하여 핏줄같은 배관을 통해 건물이나 가정으로 보낸다. 물은 배관을 타고 30층, 50층, 123층까지 올라간다. 너무나 편리하다. 단, 상수도 체계가 파괴되는 자연 재난이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편리함에 비례하여 아찔할 만큼 혼돈과 아수라장에 빠질 수도 있다.
오늘날, 옛날 마을의 공동 우물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무얼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 아닐까. 현대인들은 교회, 절, 카페, 각종 모임 등을 통해 옛날 우물과 같이 상부상조하고 소식과 정보를 나누면서 친밀감ㆍ정서적 유대감ㆍ소속감ㆍ심리적 안정감 등을 얻는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클럽을 ‘물 좋다’고 비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실 커피나 술이나 구성 비율로 따지면 거의 물이다. 카폐나 나이트에 물 마시러 가는 거다. 물 마시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고, 즐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1인 가구가 늘어나고 가족마저 거의 해체 수준이다. 사이비(似而非)든 정통이든 종교적 모임만큼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감과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안정시켜 주고,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상부상조를 베풀어주는 공동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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