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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으로 글쓰기/주역 유감

'보기'와 '보여주기'에 대해

by 野垠 2023. 1. 21.

20. ䷓ 풍지 관 風地 觀

 

1.

  관괘(觀卦)는 읽을 때마다 막연했다. 바람이 땅 위를 불어가면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들의 이미지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먼지가 많이 날려 앞이 안 보이니까 잘 보라는 건가했다. 더더구나 괘사의 시작이 제사를 앞두고 손 씻는 장면이라니바람과 제사와 손 씻기는 뭔 관계래? 싶었다. 내가 뼈대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탓인지우리집 제사에서 손을 경건하게 씻는 어른은 못 봤다. 제사 음식도 올리지 않고 뭐지했다. 거기다 공자님의 말씀이라는 단전은 더 어이없었다. 아니 바람 부는 거 보면서 선왕들이 나라의 방방곡곡을 살피고 백성을 살펴 가르침을 폈다고? 아놔~ 바람부는 거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공자님의 머릿속이 궁금해진다. 공자님과 나의 수준 차이인가, 세대 차이인가? 여러 번 읽고, 할아버지 샘들의 가르침에 뭐 대략 인정!

  그래도 그렇지 육삼의 觀我生(관아생)과 구오의 觀我生은 똑같은 말인데 왜 다르게 해석하는지, 구오의 觀我生과 상구의 觀其生(관기생)은 대체 뭐가 글케 다른지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아무리 글의 내용을 이해한다 해도 진짜 하는 방법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 내 생활에서 제대로 하며 살지 못하겠더란 말이다. 내가 童觀(동관)이나 闚觀(규관)의 수준임은 안다. 더 나아가고 싶어 책도 읽고, 사람들 얘기도 듣고, 인터넷으로 뉴스도 읽어본다. 그렇다고 쉽게 이 깊어지거나 세심해지거나 그러지 않는다. 당장 육삼의 觀我生부터는 더 막막해진다. 觀我生해서 진퇴를 결정하라니~

  자기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자 얼마나 있던가? 오죽했으면 아폴론 신전에도 너 자신을 알라고 새겨놨다고 할까?

지금 내 수준은 주역 책 몇 권 빼꼼 들여다보고 마치 뭔가 아는 것처럼 떠벌리는 구이의 闚觀정도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乾卦(건괘) 구삼 君子終日乾乾(군자종일건건)의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문 닫아 걸고 책이나 제대로 읽어야겠는데~

 

  젊은 화가들이 뉴욕에서 전시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유투브 영상을 보았다. 두 젊은 아이들이 낄낄거리다 그런다. 예술은 사기다. 화가는 뭐 없어도 일단 있는 척하고 당당한 척해야 한다. 그래야 남들도 그렇게 봐준다. 쟤네 뭐 있나봐~ 그 말을 듣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 제사 얘길 한 것도, 觀我生, 觀其生을 얘기하는 것도

 

  관은 내가 보는 것만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는 것. 엄숙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그 젊은 화가들이 당당한 척, 뭔가 있는 척하는 것은 다 같은 맥락이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먹혀들게 하기 위함이라는...

  그래서 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모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볼 때는 잘 보아야하고, 보일 때는 또 의도에 맞게 잘 보여야 한다어떻게? 그건 아직 나도 모른다.

 

 

2.

  觀(볼 관)(황새 관)(볼 견)자가 모인 글자다. 황새처럼 보란 말이다. 저 높은 곳에서 조감하고, 낮게 내려와 자세히도 보고, 물속에서 먹이 찾을 때처럼 물 속까지. ㅋㅋㅋ

  상괘는 바람(또는 나무)이고, 하괘는 땅이다. 상괘는 공손함이고, 하괘는 순함이다.

  바람이 땅 위를 불어간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물들을 흔들어 제 모습을 보이게 한다. 또 바람은 땅 위의 모든 곳으로 불어 들어간다. 심지어 내 콧구멍 속으로도. 그리하여 바람은 모든 생명체의 호흡이 된다. 생명이 된다.

그걸 매의 눈이 아니라 황새의 눈으로 자-알 보란 말이다.

  괘사에서 제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역이 만들어질 시절 가장 엄숙한 행사가 아무래도 제사였으니 그랬겠다. 제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듯이 모신다. 그래서 제사의 장면을 가져왔을 것이다. 제사상에 음식이 오르기 시작하면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그러니 음식을 올리기 전 손을 씻는 장면에서 정지한다. 공손하고 순한 모습으로 신(조상)을 섬기는 엄숙한 장면을 잘 보라고.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잘 보라고.

 

  초육은 아이의 눈으로 본다. 천진하긴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아직 잘 모르는 아이의 눈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꾸 묻는다. 소인이라면 그래도 된다. 그러나 군자가 그런 시각을 가진다면 부끄러울 것이라 한다.

  육이는 슬쩍 엿보는 것이다. 여인이 문틈으로 슬쩍 세상을 내다 보듯, 그리 보아서는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오해하고 왜곡된 시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하여 바름을 지키라 한다. 역시 군자가 규관같은 편견을 갖는다면 아무리 바르게 한다해도 추할 수 있다고 한다.

  육삼쯤 되면 이제 자기 자신을 살필 수는 있단다. 스스로를 살펴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판단하란다. 음이 양자리에 있고, 도 얻지 못했으니 아직은 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육사가 되면 이제 나라의 빛을 볼 수 있다. 나라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이 되니 왕은 이런 이를 손님으로 모시고 좋은 대접을 하며 곁에 두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인재다 싶으면 벼슬도 한 자리 내리겠다.

  구오는 군주의 자리에서 자신을 본다. 자신이 제대로 백성을 다스리고 있는지 보는 것이기에 백성을 본다고 한다. 또 이쯤되면 아래의 백성(네 음)들도 구오인 군주를 보고 평가하겠지. 이때부터는 보는 것뿐 아니라 보이는 것까지 포함하는 으로 변화된다. 다시 괘사로 돌아가, 그 제사를 관장하기 위해 손을 씻는 이가 바로 구오일 것이다.

  상구는 구오가 군주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것이다. 군주가 제 역할을 잘하고 있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나 항상 자신을 살피고, 군주를 살피고, 백성을 살피고, 또 구오와 자신의 처신이 아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도 살펴야 하니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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