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나거나 숨거나 피해야 할 때인가, 자리를 지키거나 맞서 싸워야 할 때인가. 상황에 따라, 역량에 따라, 이해득실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르리라.
주역(周易) 천산돈괘(天山遯卦䷠)의 돈(遯)은 ‘피함’, ‘물러남’, ‘숨음’이다. 돈괘에서는 소인(小人)이 득세하여 어지러운 때를 물러나야 할 때로 말하고 있다. 위에는 건괘(乾卦☰)가 있고 아래에는 간괘(艮卦☶)가 있다. 전체로 보면 아래에 음효(陰爻) 두 개가 자라 올라가고 있고, 양효(陽爻) 네 개는 밀려나고 있다. 음효는 소인(小人)을, 양효는 대인(大人)을 상징한다. 이러한 때는 물러나야 형통하고 바르게 해야 조금의 이로움이 있을 뿐이다.
B급 이론이 생각난다. 어떤 조직을 구성할 때 B급을 장(長)으로 앉히면 동급이나 그 이하 수준의 사람으로 조직 전체가 구성된다고 한다. 소인(小人)이 득세하여 권력을 잡으니 집권층에는 소인(小人)이나 소소인(小小人)들만 들끓고 있다. 너무나 작고 가벼워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다.
소인배가 득세한 때에 군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군자는 소인을 멀리하되 악하게 아니하고 엄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군자라면 득세한 소인배를 스스로 가까이 할 리 없다. 그 소인배 또한 군자를 가까이 할 리가 없다. 득세한 자가 소인이라 해서 악하게 하면 극악무도(極惡無道)한 행패를 부리고 뒤끝 작렬할 수 있다. 하지만 바르고 엄(嚴)하게 하여 굴복하게 할 수는 있으리라.
물러나는 상황에 따라 은둔의 꼬리가 밟히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은둔의 의지가 질긴 황소가죽으로 묶은 것 같아야 할 때가 있다. 걸리는 게 많아 병 걸린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세력을 모아야 할 은둔의 때도 있다. 은둔해야 할 때는 은둔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은둔, 여유로운 은둔을 해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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