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미학산책』(정민)에서 저자는 버드나무가 봄날의 서정을 촉진시키는 환기물인 동시에 ‘이별과 재회에의 염원’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 예로 다음 작품들을 예로 들고 있다.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손대
계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봄비에 새 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ㅡㅡ홍랑
위성의 아침 비가 가는 먼지 적시니
객사엔 파릇파릇 버들 빛이 새롭다
그대에게 다시금 한 잔 술 권하노라
양관을 나서면 아는 이가 없을지니
---<송원이사지안서>, 왕유
동성엔 봄풀이 푸르다지만
남포의 버들은 가지가 없네
---<증별(贈別)> 저사종
내 낀 버들 어느새 금실을 너울대니
이별의 징표로 꺾이어짐 얼마던고
숲 아래 저 매미도 이별 한을 안다는 듯
석양의 가지 위로 소리 끌며 오르누나
----<통달역(通達驛)> 김극기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임 못 잡았네.
어여쁜 아가씨들 하많은 눈물 탓에
부연 물결 지는 해도 수심에 겨워 있네.
----<패강곡(浿江曲)> 임제
옛날 중국에서는 벗과 헤어지며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절류(折柳)’는 배웅하여 이별함을 이르는 말로 쓴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다.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홍랑의 시조에서처럼 이별하더라도 ‘나’ 대신 봐달라는 의미일 수 있다. '버드나무 류(柳)'의 중국음은 '머물 류(留)'와 똑같다고 한다. 그래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를 꺾어주는 것은 가지말고 ‘머물러달라’는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다.
폐허가 되거나 농사를 짓지 않는 전답에 가장 먼저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이 버드나무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울창해진다. 어쩌면 이별 뒤에 하루 빨리 잊고, 버드나무처럼 새 잎 돋우어 무성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수는 없을까.
사람들은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선물이나 정표로 준다. 마음은 준다고 하나 물리적 실체가 없다. 몸을 주고싶기도 하겠지만 받지 않을 것이 뻔하고, 특정 부위를 도려내서 주기도 힘들다. 정표도 그 종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리라. 먹고 없어지는 것인가. 두고두고 간직해야 하는 것인가. 버들가지처럼 꺾여 죽은 듯 싶었는데, 새 잎 돋아 다시 살아나는 것인가. 애 키우듯이 돌봐야 하는 개나 고양이를 정표로 준다면 어떨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별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어 사라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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