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지어낸 구조물 중에 부피와 무게가 가장 큰 것이 콘크리트일 것이다. 도로, 다리, 각종 빌딩, 아파트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갈수록 더 높아지는 콘크리트 건물은 발전하는 인류의 문명의 상징하는 듯하다.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도 그에 비례하여 높아지는 것일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영화다. 콘크리트 구조물 중에 아파트가 나온다. 아파트는 하나의 마을 공동체다. 아파트는 자연적으로 형성됐던 마을 공동체만큼 연대의식이 끈끈하지 않다. 어느날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 모든 건물들이 무너버리고 한 아파트만 남는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무너져 졸지에 난민이 된 사람들이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로 몰려든다.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 주민들은 처음에는 난민을 받아주다 회의 끝에 추방해버린다. 함께 행동해야 생존이 가능한 재난 상황이 되자 아파트 주민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해진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해야 할 역할도 정한다. 외부 사람에 대한 적대감은 커지고 공동체 내부 사람들끼리는 연대와 보호 의식이 투철해진다.
극한적인 재난은 숨겨졌던 욕망의 민낯을 적나라하고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사실은 일상적인 현실 사회에서 욕망에 따른 인간의 행동들은 영화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난폭하다. 감추고 호도하고 포장하거나 왜곡해서 잘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현실에서 멀쩡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또 수많은 인간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무기들을 아직도 경쟁적으로 개발하고 있지 않은가. 또 힘없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법과 제도와 권력자들의 농간이 얼마나 많은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주민들이 생존하기 위해 주민이 아닌 사람들은 추방한다. 또 음식을 찾으러 나갔다가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다 죽고 죽이는 싸움과 전투까지 벌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을 구분해야 된다고 말한다. 평소에도 헷갈릴 때가 있지만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의문이 든다. 국가 공동체든 회사 공동체든 종교 공동체든 마을 공동체든 작은 동아리나 계모임 공동체든, 모든 공동체는 구성원들끼리 결속력에 비례하여 그 바깥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거나 적대적인 면이 있다. 아프리카 난민을 거부하지 않는가. 자국민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다른 나라 기업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는가. 극한 상황이 되면 대부분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으려 하지 않을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희생과 죽음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지 않을까.
기후 위기로 재난이 일상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미래에 대한 상상은 대부분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지구 끝의 온실’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설국 열차’도 소설 ‘파피온’도 모두 암울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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