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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와 나의 해방일지

시절인연

by 춘희75 2023. 4. 18.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가 되면 만나는 친구가 있다. 맞은 편 아파트에 사는 그녀는 흰색 티볼리를 몰고 매번 나를 태우러 온다. 환한 미소로 반갑게 인사하고는 여느 때와 같이 수다를 떤다. 신나서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다. 환갑이 좀 지난 그녀는 나보다 14살 정도 위다. 나이로 따지면 이모뻘이지만 이모보다는 친구 같은 그녀다. 사랑스럽고 현명하지만, 때로는 짠한 그녀가 요즘 나의 소중한 시절인연이다.

 

  4개월 전 인문학 공부를 하는 한 공간에서 만나 카풀을 하며 인연을 맺게 된 그녀, H이다. 월요일엔 타로, 화요일엔 장자, 금요일엔 민화 수업을 함께 들으며 일주일에 세 번을 만난다. 차가 없어 교통편을 신세지고 있는 내 마음이 불편할까 그녀는 이런 말을 해준다. “도움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나중에 형편이 될 때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다시 돌려주면 되니까 맘 편하게 생각해.” 60이 넘은 나이에도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은 그녀는, 연장자임에도 겸손하고, 품도 넉넉하다. 만날수록 닮고 싶은 어른이다.

 

  H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군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 책임을 지고 싶다는 아들의 결정을 어렵게 받아들였다. 돌 무렵 아이의 엄마는 아이와 함께 집을 나갔다. 그러다 아이가 4살 되던 무렵 홀연히 나타나 아이만 맡겨두고 떠났다. 그렇게 그녀는 할머니이자 엄마가 되었다. 손녀 육아를 위해 부모교육, 심리 등의 공부를 열심히 하며, 사랑과 정성으로 키웠다. 그렇게 키운 아이는 요즘 혹독한 사춘기의 회오리 속을 헤매는 중이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방황을 지켜보며 자책도 하고, 때론 원망도 한다. 어떤 순간에는 주저앉기도 하고, 또 현명하게 대처하기도 한다. 내공이 만만치 않은 그녀이지만, 손녀 앞에서는 언제나 약자 같아 보인다. 그런 그녀가 짠하기도 하지만 배울 점도 많다. 나에게도 곧 사춘기가 도래할 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손녀가 회오리 속을 벗어날 때까지 그녀가 지치지 않고 잘 버틸 수 있기를 바래본다.

 

  소중한 인연을 꼽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바로 K. 16년 전, 초임 고등학교에 출근한 첫날,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직원 조회시간 옆자리에 앉게 된 연으로 인사도 나누고 가까워졌다. 당시에 자취할 집을 못 구해 부산에서 울산까지 버스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서 처음 시작하는 일이 녹록치 않았다. 급식실이 어딘지 같은 사소한 것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서러움만 쌓여갔다. 그러다 문득 첫 날 만난 K가 생각나 무작정 찾아갔다. K도 전출 온 첫 해에다 3학년 담임을 맡아 경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쑥 찾아온 나를 반기며 안부를 물었다. K의 따뜻한 한마디에 그간 설움이 봇물처럼 터져 한참을 펑펑 울었다. 집을 아직 못 구했다고 하니 본인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해진다는 말과 함께. 염치 불고하고 다음 날 바로 그 집으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정말 출퇴근길의 고단함이 줄어드니 적응도 빨라졌다.

 

  그 뒤로도 학생과의 관계로 고민할 때 상담연수를 추천해 줬다. 연수 후 관련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하니, 울산에서 연수를 진행하고 계시는 한 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그 선생님을 만나 몇 년을 쫓아다니며 치열하게 공부했다. 어느덧 내 삶은 그 선생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런 인생의 스승님과 연결해 준 것도 K이다. 학교를 옮겨 만남은 뜸해졌지만, 좋은 일, 궂은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는다. 고맙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귀한 인연이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 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선뜻 방을 내어줄 수 있었냐고 말이다. K도 초임 때 집을 못 구해 어려움을 겪었고, 그 때 방을 기꺼이 내어준 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받은 도움을 돌려주는 거라고 말하는 K가 참 커보였다. 그 말이 인상적이어서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는데, H에게 같은 이야기를 또 듣게 되니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받을 때도 빚진 마음으로 무겁게 받을 필요 없고, 줄 때도 생색내며 줄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세상은 주고받으며 사는 거구나 싶다. 그런 소중한 가치를 알려 준 그들은 인생의 스승 같은 인연들이다. 내년에 복직하게 되면 H와도 지금처럼 자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30년만의 휴식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H와의 시간을 충분히 누려야겠다.

 

  이삼십 대에는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되면 그 연이 끊어질까 전전긍긍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기도 했지만, 인복이 없다 여겼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임을 만들고 총무를 맡아 궂은일을 자처하며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그런 애씀을 몰라주는 사람들에게 서운함과 억울함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노력에도 자연스레 소원해지는 관계들도 생겼다. 혼자만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때가 맞아야하는 일이다. 때가 다한 인연에 연연하는 것은 집착일 뿐이다.

 

  시절인연은 불교의 업설과 인과응보설에 의한 것으로 사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아하했다. 인연도 때와 상황에 맞게 맺어지고 또 헤어지는 것인데 왜 그리 집착했을까 싶다. 애쓴다고 만나지지도, 헤어짐을 막을 수도 없는 데 말이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그들이 그 시절 나에게는 참 소중했기에 영원한 관계를 맺고 싶어 애를 썼던 것 같다

 

  장자 내편 소요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 이처럼 손을 트지 않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지만, 어떤 사람은 땅을 분봉 받았고, 어떤 사람은 헌 솜을 세탁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그것은 바로 사용하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야. 지금 자네는 다섯 섬들이 조롱박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그것을 요주로 삼아 강이나 호수 위로 떠다닐 생각은 못하고, 넓고 펀펀하여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 투덜대기만 한단 말인가? 자네는 생각이 꽉 막힌 사람일세.”

 

  혜자가 위나라 왕에게 받은 조롱박 씨를 심어 열린 커다란 박이 아무 쓸모가 없어 깨부숴버렸다고 하자, 그에 대한 장자의 대답 중 일부이다. 사물에는 때에 맞는 쓰임이 있다는 것이다. 인연도 마찬가지로 때에 맞는 쓰임이 있지 않을까? K는 그 시절 나에게 와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한 스승님과의 만남을 연결해 주어 내 삶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H는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내가 인문학 공부를 통해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나도 누군가의 때에 그런 쓰임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쓰임이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냥 존재 그 자체가 쓰임이 될 수도 있다. 상대가 특별하게 뭔가를 해주려고 했다기보다 자신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을 했는데, 그것이 나의 때에 맞아서 도움으로 작용이 된 것이다. 역으로 나의 자연스러운 어떤 행위가 타인의 때에 맞아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하던, 하지 않던 사람은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해왔다. 좋았던 인연도 있고 악연이라고 생각했던 인연도 있다. 좋은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그 인연도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아픔과 슬픔도 안겨줬다. 악연은 그 당시는 너무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나를 성장시킨 부분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마냥 좋기만 한 것도, 마냥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인생사 새옹지마가 아니던가.

 

  스쳐간 수많은 인연 중 지금은 연락처도 안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지만, 지금 이순간도 어디선가 다들 치열하게 각자의 시간들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HK 외에도 나의 시절들에 함께해준 많은 인연들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당신들이 있어서 그 시간들을 지나올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현재 시절인연들, 그대들이 있어서 지금이 내게는 화양연화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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