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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상(想像理想) 이야기/치유와 수련의 필사(筆寫)

『장자』 전문 읽기-소요유(逍遙遊)편(1)...붕과 종달새

by 두마리 4 2025. 5. 29.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변화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하며 이 붕의 등 넓이도 몇 천 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이 새가 한번 기운을 내어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 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란 천지(天池)를 말한다.

 

<제해(齊諧)>란 기괴함을 적은 것으로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라 날아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3천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리나 날아올라가 6개월을 가서야 쉰다.’ 하였다.

 

아지랑이와 티끌은 생물들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저렇게 푸른 것은 저 하늘 본래의 빛인가? 너무 멀어서 끝이 없는 까닭인가? 저 위에서 지상을 굽어보아도 또한 이러할 뿐이다.

 

대체로 물이 고인 곳이 깊지 못하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한 잔의 물을 뜰의 파인 곳에 부으면 하나의 지푸라기는 배마냥 뜨지만 술잔을 띄우면 가라앉는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쌓인 것이 두텁지 않으면 저 붕새의 큰 날개를 날리기에는 무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9만리쯤이나 올라가야 바람이 그 밑에 있게 되고, 그런 뒤에야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어야 곧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매미와 메까치는 이를 비웃는다. ‘우리는 훌쩍 솟아올라 느릅나무나 박달나무가 있는 곳까지 가려 해도 때로는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는데, 어째서 9만리나 올라가서 남쪽으로 가려하는가?’

 

가까운 들판으로 가는 자는 세 끼만 먹고 돌아와도 배가 여전하지만, 백리를 가는 사람은 전날 밤부터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자는 3개월 동안의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니, 이 두 마리 벌레들이 또한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단명하는 이는 장수하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 줄을 아는가? 아침나절에만 사는 버섯은 그믐과 초승달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니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것이 있는데, 5백년을 봄으로 삼고 5백년을 가을로 삼았다. 또 태고 적에 큰 참죽나무가 있었는데 8천년을 봄으로 삼고 8천년을 가을로 삼았다. 그런데 팽조(彭祖-요임금의 신하, 8백년을 살았다고 함)가 오래 산 것으로 소문이 났으니 슬프지 아니한가?

 

탕왕(湯王)이 극()에게 물은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궁발(窮髮-북극의 불모지)의 북쪽에 명해(冥海)가 있는데 천지(天池).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넓이가 수천리나 되고 그 길이를 아는 자가 없다.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또 거기에 한 마리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등은 태산(泰山)과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은데 회오리 바람을 타고 9만리를 돋아올라 구름을 벗어나고 청천을 등에 진 연후에야 남쪽을 도모하여 남쪽 바다로 간다. 종달새가 이를 비웃어 이렇게 말한다.

 

저들은 바야흐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뛰어올라 두어 길도 못가서 도로 내려와 쑥대밭 속에서 펄떡거리는데. 그리고 이런 정도로 최고의 비행인데, 저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는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대체로 지혜가 겨우 한 관직이나 담당할 만하고 행동이 그 고을 사람에게만 칭찬받을 정도이며, 덕은 그 나라 한 임금의 비위에나 맞는 정도라서, 한 나라의 신하로서 임명된 자가 스스로 뽐내는 것은 이 종달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송영자는 오히려 이들을 비웃는다. 그는 온 세상이 그를 칭찬해도 으스대는 법이 없고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해도 그만두지 않으니, 안팎의 분수가 정해져 있고 영예와 굴욕의 경계가 구분되면 그만일 뿐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직 흔치 않다. 비록 그렇다 해도 아직 지극한 덕을 세웠다고 할 수는 없다.

 

대저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원하게 잘 지내다가 보름만에야 돌아온다. 그래서 그는 복을 받는 사람 중에서 아직도 그리 흔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비록 걸어다는 것은 면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의지해야 할 바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 천지의 바른 기운을 타고 육기(六氣-천지춘하추동의 여섯 기운)의 변화를 몰아서 무궁에 노니는 자는 그가 다시 무엇을 의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물아(物我)의 구분이 없고, 신인(神人)은 공을 의식하지 않으며, 성인(聖人)은 명예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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