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臨終)
2023년 5월 31일 22시 50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손자들의 할머니, 외사촌들의 고모, 이종사촌의 이모이기도 한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신다.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하신지 95일째였다. 자식이 육남매였는데, 아무도 임종(臨終)을 못했다. 유교적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모두 불효자다. 임종의 두 번째 뜻은 ‘부모가 돌아가실 때 그 곁에 지키고 있음’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동생이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 통화 녹음 파일을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어머니가 상태가 안 좋아져서 호흡이 불편해지고, 산소포화농도도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안 좋아졌다가 회복되고,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 년 동안 살아계시는 사례를 많이 들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첫째 아들과 둘째 누나가 이날 면회를 신청했는데, 상태가 안 좋아서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첫째 아들은 시골집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아무래도 께름칙하고 불안했다. 밤 9시 30분이 넘었는데 병원측에 억지를 부려 면회를 했다. 계속 지켜보지는 못하고 면회 마치고 집으로 가다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병원으로 부랴부랴 왔다. 첫째 아들은 마지막으로 장남을 보고 가려고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처음 입원했을 때는 곧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느낌으로 자식들이 면회를 하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했다. 그런데 좋아졌다 안 좋아졌다 하면서 90일 넘어가자 일주일 한 번 면회하는 것도 아무도 안 하는 때가 생겼다. 돌아가시기 전 주 금요일에 둘째 내외가 면회를 했다. 2주만이었다. 입원하신 후로 가장 의식이 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셨다. 말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시는 듯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요구하는 대로 손에 힘을 주고 눈동자를 맞추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뭔가 의사 표현을 하시는 것 같았다. 입을 움직이며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듯했다. 둘째 아들은 입원하신 후로 가장 상태가 좋으신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신이 보았다고 위안을 삼았다.
쓰러지시기 하루 전날 저녁에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다. 마을 회관에서 식사를 하신다고 했다. 마을 회관에 계신다고 하면 통화를 길게 하지 않았다. 매일 한 번씩 하는 통화라 길게 할 내용도 없었다. 통화하면서 음성으로 좀 이상한 기색이 있는가를 살피는 식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때가 임종이었다. 그나마 육신을 마음대로 하시고, 말씀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때였다. 물론 그 다음 날 아침까지 정정하셨지만 자식인 나와의 임종은 이때였다. 아니 그보다 며칠 전 시골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식사를 같이 하고 말을 나누고 한 그날이 임종이었다.
우리는 잠깐이든 오래든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오늘 만난 사람을 죽기 전에 한 번도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바로 오늘이 그 사람하고는 임종(臨終)이 아닐까. 문득 만나는 매순간이 임종일 수 있다는 태도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살면 너무 슬플까. 아니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태도니까,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될까.
육신의 팔할이 대충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람도 다리 하나 부러져 꼼짝 못하고 있으면 말할 수 없이 갑갑함을 느낀다. 그런데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래도 계속 살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줄곧 들었었다. 일종의 형벌이 아닐까. 전국의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 의미 없는 상태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을까. 이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는 천사에 가까울까, 악마에 가까울까. 이런 생각은 비정(非情)하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일까.
육신이 멀쩡할 때는 이빨 사이에 끼는 고춧가루 하나까지 신경 쓴다. 신발부터 옷차림, 머리, 화장까지 인간적인 품위와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의식만 있거나, 의식마저 없다면 어떨까. 옛날에 없던 요양병원과 요양원에서의 임종(臨終)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생각한다. 임종(臨終)의 첫 번째 뜻은 죽음을 맞이함이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임종은 새로운 풍속이다. 가족들로부터는 버려지다시피 하여, 의사와 간호사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생명을 연장시키다, 죽음을 맞이하는 새로운 고려장(高麗葬)이 아닐까.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일종의 병원이다. 환자가 병원에 있고, 0.1%의 회생 가능성만 있더라도 의사나 간호사는 모든 의술을 동원해서 살리려고 애써야 하는 게 지극히 마땅하다는 생각도 든다. 의사가 치료 포기를 판단할 의무와 권리는 없지 않을까. 죽음을 거부하는 삶에 대한 욕망, 인간의 불완전함과 유한성, 치료나 생명 연장에 필요한 비용, 육신이나 정신의 불편함에 따른 생존의 의미와 가치 등을 생각하면, 늘 딜레마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정신과 육체가 멀쩡할 때 유언을 남겨둬야 하리라. 또 그럴 수 있도록 몸과 영혼을 잘 관리해야 하리라.
어머니는 자식들이 사이가 안 좋아도 그것을 해결할 힘은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의 말이나 행동을 이래저래 옮겨서 갈등을 증폭시키지는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말하지 않았고, 그나마 잘 하는 것만 다른 자식들한테 전했다. 자식들을 표나게 차별하지는 않았다. 아니, 내가 이렇게 느끼니까 내가 제일 특혜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 뜻을 따랐다. 아버지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아들과 딸을 차별했고 형편에 따라 아들과 딸의 진학을 차별했다. 아들 중에서도 차별하여 진학을 시켰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도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어머니도 차별에 가담한 셈이긴 하다. 자식 중에서는 내가 제일 운이 좋았다. 넷째였고, 내가 대학을 갈 때는 대학 정원도 많이 늘어서, 시골에서도 대학을 많이 가는 분위기였다. 형과 누나들은 넉넉지 않은 경제 사정과 돈을 모아 재산을 늘리려는 아버지의 계획 때문에 진학을 제대로 못했다. 동생들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진학이 여의치 않았다.
장례식장에 아들 셋과 딸 셋이 모였다. 며느리들과 사위들도 모였다. 아들과 딸이 낳은 손자 손녀 13명이 왔다. 그 중에 결혼한 손자와 손녀가 다섯인데 그 며느리와 사위들이 왔다. 그 손자와 손녀가 낳은 증손 11명 중 9명이 왔다. 직계 자손이 30명이다. 며느리와 사위까지 합치니 어머니 장례식장에 올 사람은 모두 41명이다. 이중에 첫째 아들의 사위와 그 증손자 2명만 빼놓고 다 모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그 자손들이 사흘 동안 같이 지내게 됐다. 서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끼리 새로운 공감(라포르)이 생겼다. 대부분은 잠시 생겼다 꺼지겠지만.
분향실에 놓인 어머니 영정 사진을 보니 편안해보였다. 왼쪽에서 보면 왼쪽으로 나를 보셨고,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 보면 오른쪽으로 또 보고 계셨다. 영정이 놓인 분향실 방에서 이틀을 잤는데, 요양병원에 계실 때보다 내 마음이 가볍고 편안했다. 아버지 묘와 합봉을 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36년 만에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입관을 지켜봤다. 수의를 입고, 그 위에 명주옷을 입으시고 꽃신을 신으시고, 화장을 했다. 입술에 빨갛게 루즈까지 바르시고 자손들 앞에 반듯하게 누워 계셨다. 수의와 명주옷과 그 위에 덮고 묶는 삼베 천들은 어머니가 길쌈을 하실 때 직접 만들어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입술에 루즈까지 바른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아주 어릴 때 한두 번 본 것 같기도 하다. 화장하신 어머니 얼굴을 처음 보다니! 틀니를 끼워서 염을 하는데, 틀니를 시골집에 갖다 놓아서 다른 천으로 대신 메꿔 놓았다. 화장한 어머니 얼굴이 조금 덜 예뻤다. 명주 옷 위에 천을 덮고 싸매고 그 위에 또 천을 덮고 묶고, 그 위에 접은 흰 종이를 겹쳐 놓으면서 또 묶었다. 이제 이 육신은 쓸 만큼 썼으니, 영혼이 다시는 이 육신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꽁꽁 싸매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얼굴을 보면서 한 마디씩 했다. 담담하게 하려고 했다. 이때까지 주체할 수 없게 울음이 터진 적이 없어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을 하려는데 울컥 치밀어올라서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글을 학생들한테 예시로 읽어주다 울음을 멈출 수 없어 수업을 거의 못한 때가 있었다.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이 나지 않아 남보기 좀 민망하기도 했었다. 나이가 들어 여성 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져서 그런 모양이다. 고생도 많이 하고 외롭게 오래 사셨는데, 기쁜 일은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아들인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아내, 아들과 딸의 손을 잡고 잘 살겠다고 말했다.
문득 나는 좋은 아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좋은 아버지일까. 좋은 남편일까. 좋은 사위일까. 좋은 시아주버니일까. 좋은 동생일까. 좋은 형일까. 좋은 오빠일까. 좋은 시동생일까. 친인척 관계로 생기는 이름에 어느 것 하나 자신 있는 게 없다. 지금까지 그 이름에 맞게 제 역할을 성실하게 하려고 노력한 게 없다. 이름값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한다.
어머니는 잘 생겼는데 꾸미고 화장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밭일이든 길쌈이든 음식이든 능력이나 솜씨가 좋았다. 무엇을 하든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잘 하는 편이었다. 청소하고 멋내는 일은 할 줄 몰랐다. 일하는 것만 신경을 쓰셨다. 성격은 무던하셨다. 살갑게 안아주고 다독거려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냉냉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육남매를 거의 두 살 터울로 키우다 보니 하나하나 애틋하게 보살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큰외삼촌네 외사촌들이 왔다. 어머니가 맏딸이라 큰외삼촌네 외사촌들과 같은 나이 또래가 많다. 중학교를 같이 다니고 같은 ‘면(面)’에 ‘리(里)’만 달라 왕래도 자주 했다. 외사촌들이 기억하는 큰고모는 특별했다. 고모들 중에 가장 기억이 많다고 했다. 나는 외가하면 늘 곰방대 물고 늘 따뜻하고 인정스러웠던 외할머니를 기억한다. 또 겨울에 외가에 가면 큰외숙모가 챙겨주시던 배추 이파리 시퍼런 김치와 장독에 재놓았다가 퍼내주시던 고욤의 맛을 기억한다. 외사촌들은, 좀 산다는 집으로 시집가서 친정에 올 때마다 이것저것 챙겨와서 나눠주던 큰고모로 어머니를 기억한다고 했다. 입장 다른 나는 몰랐던 면이다. 아버지가 집안 경제를 다 챙겼는데, 길쌈해서 번 돈만은 어머니 마음대로 쓰라고 주셨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큰외숙모는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데 치매로 요양원에 계셔서 오시지 않았다. BTS 뷔(김태형)의 외할머니인 둘째 외숙모는 그날 외할아버지 제사라고 안 들어오셨다. 외삼촌 중에 살아계신 막내 외삼촌이 오셨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인물이 좋다고들 했다. 합천에 계신 둘째 이모도 와서 의자에 앉아 계셨는데, 온전한 정신이 아니신 듯했다. 용산에 계신 막내 이모와 그 아들, 딸들이 왔다. 어머니와 막내 이모는 모습이 많이 닮았다. 막내 이모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헷갈려서 인사를 잘못 한 경우도 있었다. 뒷모습만 보고 나도 막내 이모를 어머니로 착각한 적이 있다. 막내 이모의 큰아들은 군대 갔다 와서, 자신의 어머니와 큰이모가 분별이 안됐었다는 좀 우스운 이야기를 했다.
시골 마을에 가니, 어머니보다 연세가 몇 살 더 많거나 더 적은 동네 아지매들이 나와 있었다. 나를 잡고 슬퍼하면서, ‘아이고, 이렇게 쉽게 가는 걸’ 하면서 울었다. 그 중에 구산아지매가 제일 슬퍼하셨다. 구산아지매는 우리집과 가까워 어머니와 단짝처럼 지냈다. 항렬도 나이도 더 높지만 마을 샛터 인근에 살아남은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었다. 동네 회관에 갈 때도 같이 갔다. 마실 나올 시간이 됐는데, 기척이 없으면 전화로 확인하고 집으로 가보기도 하는 사이였다.
어머니는 이제 누구의 딸이나 어머니나 할머니, 고모나 이모가 아닌 온전히 자신으로 돌아가셨다. 죽음은 모든 삶의 끝이다. 동시에 모든 삶의 시작이다. 어머니는 이 세상과는 하직하고 또 다른 행성이나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했으리라. 나도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의 삶은 처음이다. 어머니의 육신을 구성하던 원소들은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갔으리라. 그 원소들은 또 다른 존재를 이루리라.
‘나’는 내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탁닛한의 말이 생각난다.
'일상의 파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점은 안 좋기만 할까 (2) | 2023.07.25 |
---|---|
제초(除草) 시중(時中) (2) | 2023.06.21 |
좋은 습관 몇 가지 (3) | 2023.05.31 |
잠식(蠶食) (3) | 2023.05.29 |
새벽에 소쩍새 소리를 듣다 (2) | 2023.05.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