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의 중니열전(仲尼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중니는 공자의 자(字)이다. 자(字)는 성년식인 관례(冠禮) 이후에 본 이름 대신에 부르는 이름이다. 중니열전은 공자의 핵심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하(子夏)가 물었다.
“‘고운 미소에 팬 보조개, 아름다운 눈에 또렷한 눈동자, 흰 바탕에 여러 색깔 그렸구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 이후의 일이다.”
자하가 여쭈었다.
“예(禮)는 나중에 온다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구나.”
『논어(論語)』의 팔일(八佾)에 나오는 내용을 사마천이 인용한 것이다. 팔일(八佾)은 팔일무(八佾舞)에서 온 말이다. 팔일무는 일무(佾舞)의 하나로 악생(樂生) 64명이 여덟 줄로 정렬하여 아악에 맞추어 추는 문무(文舞)나 무무(武舞)로, 규모가 대단히 크다. 논어 팔일편에 따르면 천자는 팔일무, 제후는 육일무, 대부는 사일무, 선비는 이일무가 예(禮)에 맞다.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것은 바탕보다 뒤의 일이다. 바탕은 소질(素質)이고 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것은 문(文), 즉 무늬이다. 바탕이 없는데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바탕이 깨끗하지 않는데 그림을 잘 그리기는 어렵다.
자하가 공자에게 ‘예는 나중에 오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인(仁)보다 나중에 오는가를 묻는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예(禮)는 인(仁) 다음이다. 인(仁)은 진괘(震卦☳)ㆍ동방(東方)ㆍ봄ㆍ목(木)이 있는 궁에 놓인다. 원(元)에 해당한다.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에 시작이고 으뜸이다. 예(禮)는 리괘(離卦☲)ㆍ남방(南方)ㆍ화(火)의 기운이 있는 궁에 있다. 봄에 씨앗의 싹틈이 없으면 그 다음 여름, 가을, 겨울의 작용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인(仁)의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의예지신(義禮智信)은 불가능하다.
예(禮)는 무늬고 그림이고 채색이다. 예는 말과 행동, 표정, 태도, 옷맵시 등으로 표현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예(禮)는 가식(假飾)일 수 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일 수 있다. 인(仁)은 거짓으로 꾸밀 수 없는 씨앗이나 바탕과 같은 것이다.
하늘이 무늬와 채색이 천문(天文)이고, 인간의 무늬와 채색이 인문(人文)이다. 그림은 바탕과 무늬 구별이 쉽다. 인간의 경우, 바탕과 채색의 구별이 쉽지 않다. 타고난 바탕이 그런 건지, 자라면서 그렇게 길러진 것인지 언뜻 분간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람을 볼 때 인(仁)과 예(禮) 모두 중요하지만 인(仁)이 먼저이다. 인(仁) 없는 예(禮)는 가식(假飾)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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