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소년이 온다』 123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파란 유황불의 화환(花環) 속에서 나는 눈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몸이 없어지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부끄러움의 재 한 줌.”
황지우의 시, 「나는 너다 44」의 일부다.
황지우는 전남 해남에서 나서 광주에서 자랐다. 5.18 당시 서울에 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980년 5월 30일. 황지우는 ‘땅아 통곡하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단성사 극장 앞에서 몇 장 뿌리다가 잡힌다. 그 사건은 김대중 내란 음모와 관련된 도심지 폭동 사건으로 위조된다. 반복되는 고문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을 저주하였고 친구를 무고(誣告)하는 허위 자백을 하고 만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친구는 그가 보는 앞에서 같은 고문을 당해야 했다.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고 말한다. 우물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가 있다면 사람이라면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아이를 구한다고 예를 든다.
“과인같은 사람도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호흘에게 들으니 그가 왕께서 당상에 앉아 계시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물으니 그 사람이 흔종(釁鐘)에 쓰려고 하옵니다. ‘그 소를 풀어주거라, 죽으러 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그럼 흔종하는 것을 폐지하오니까’ 하니 어찌 그만들 수 있겠는가, 대신 양을 쓰도록하라, 하셨더니 그것이 사실인지요?”
『맹자』 양혜왕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흔종(釁鍾)은 새로 종을 만들 때 희생(犧牲)을 잡아 그 피로 종에 바르고 제사 지냄을 말한다. 왕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겠지만,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것에 측은해 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적인 정치를 위한 기본이다. 정치를 잘 하려면 백성의 삶을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해봐야 한다.
유태인 학살 과정의 총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놀랍게도 근면하고 청렴한 관료였다.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밖에 없다고 강변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으로 직접 눈으로 봤어도,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학살을 당해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국회의원들이 한 달만이라도 최하층민의 노동을 하고 최저 수당을 받아서 오로지 그것만으로 한 달을 살아본다면 서민의 삶이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소년이 온다』의 작가 한강은 5.18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 직전에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한강은 5.18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볼 수 있는 자료는 다 봤다고 말한다. 마치 실제로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자다가 총검으로 가슴을 찔리고 숨막히는 악몽까지 꾸었다고 한다.
『소년이 온다』를 읽는 독자들도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상황과 아픔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학살당해 포개진 시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눈으로 그 상황을 묘사하고 설명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힘들고 아플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의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간접적으로마 그 참상(慘狀)을 실제처럼 느끼게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눈앞의 참상을 보면서도 공감하지 못하고 동정심도 없는 사람들도 있다. 아예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잔인하게 짓밟고 그 행위를 정당화한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수많은 살육을 주동했던 사람들은 그렇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다. 그런데 인간 아닌 식물이나 다른 동물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의 양심, 도덕, 법, 자유, 인권, 전쟁, 살상, 고문, 파괴를 생각한다. 너무나 비인간적인가. 너무나 인간적인가.
-『소년이 온다』(한강)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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