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에 한번 "장자"를 배우고 있다.지난 1년 '수박 겉 핥은'노자지만,덕분에 어렵지않게 장자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장자만의 비유와 상징.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들이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노자도 그러하지만 장자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이는 곧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장자의 핵심이자 "장자토론수업"이 지향하는 바라,강의가 끝날 쯤 선생님께서는 늘, 다음 수업 참여를 위한 " 즐거운 숙제"를 주시는데 지난 주 숙제는 바로,
그래서 '혼돈’은 왜 죽었을까요?'혼돈'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였다.
"장자" 내편 중 7편 응제왕(應帝王) 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남해의 제왕(帝)은 ‘숙’이고 북해의 제왕은 ‘홀’이고 중앙의 제왕은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함께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이 혼돈의 은덕에 보답하려고 함께 상의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만은 있지 않으니, 그에게 구멍을 뚫어줍시다.”
그들은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을 뚫어주었는데, 7일만에 혼돈이 죽어버렸다.
질문을 받아든 1주일,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반짝"비늘이 빛났다.내 안에 있었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갖가지 생각들이 파닥파닥 튀어오르다 분분히 흩어지는 활어 비늘처럼 반짝거렸다.발아되었다.
만약,선생님께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숙과 홀은
"이런 저런" 뜻이고 여기서 7개의 구멍은 "무엇"을 의미하니 그래서 혼돈이 죽은 이유는 "이것"이라고 설명부터 하셨으면 사유의 방향이 조금은 달라졌으리라.
하지만 "바라지 않음을 바라"는 개방형 질문 덕에 질문지를 거울 삼아 지금의 나를 이리저리 비추어 보는 즐거운 숙제의 시간을 가졌다. "마음을 굶겼다" 분별을 멈추고 거울 속의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나의 밑줄 문장으로 가득한,
읽은 책들로 채워진 나만의 방을 갖는 게 꿈이다.읽었던 책을 또읽으며, 지나간 밑줄 문장과 조우하고 새로 발견한 문장 앞에서는 "아,그때 나는 무얼 읽느라 이 문장을 놓쳤을까?"회상도 하고,
읽은 책을 또읽고 또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걸 가지는 게 꿈이다.
그런데 올해는 정초부터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총 13권이지만 8권에서 멈춰버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65만 5,478개의 단어 속에 허우적거리다 훑어보기만 한 듯한 위고의 "레 미제라블"
찾았다!인생책.했지만 책을 덮고나니 아스라이 멀어지던 투르니에의 "방드르디,태평양의 끝"
그리고 뺏어오고 싶은 묘사 달인 최명희의 "혼불"
두번째 독서 역시 뺄 문장보다 덧칠할 문장이 훨씬 많은 "혼돈" 그 잡채.그래서 더 황홀한 독서의 시간.
그런데 만약 나의 가성비 없는 "혼돈"의 독서를 안타까이 여긴 "숙"과 "홀"이 내 머리에 7개의 구멍을 뚫어주어 읽는 즉시 이해되어 버리는 독서의 순간이 온다면,어떨까?
그때의 나역시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싶어할까?
아니면 "즉독즉답"의 세계에 고무된 나머지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어버리려 할까?그렇게 숙과 홀의 선의 대로 지금보다는 한껏 더 현명해질까?
아닐 거다.
장자의 이야기 속 "혼돈"처럼 7개의 구멍 속에 잠식되어 나만의 "혼돈의 독서""혼독"은
죽고 말 것이고 재미는 없고 교만만 남은
껍데기 독서만 남겠지.
한때 내가 읽는 모든 구절이 다 "오독"인 건 아닌가?하는 강박에 놓인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때의 나는 읽고있는 책의 주인이 되려고 한듯 하다.
"혼돈"이 혼돈으로 남을 수 있게 둘 줄 아는 마음, "혼돈독서"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중요한 독서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장자에서 배운다.뜬금없이!
"배웅하지도 않고 마중하지도 않으며,호응은 하되 묻어두지도 않는다.그 때문에 모든 대상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고,또 그로 인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응제왕 7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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