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혼구(匪寇婚媾); 도적이 아니라 혼인할 짝>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도둑이야!”
“아니, 내가 뭘 훔쳤다고 도둑이래?”
“자기는 내 마음을 훔쳤잖아.”
“헐…….
주역(周易) 괘(卦)에 비구혼구(匪寇婚媾)라는 말이 세 군데 나온다. 비구혼구는 도적질하려는 악의(惡意)를 품고 온 사람이 아니고 혼인(婚姻)하자는 호의(好意)에서 왔다는 말이다.
수뢰둔괘(水雷屯卦䷂) 육이(六二)에 ‘어렵거나 머뭇거리며 말을 탔다가 내리니 침범하는 도적이 아니라 혼인할 짝이니 여자가 (바름을 지키며) 곧 혼인하지 않다가 10년 되어서야 혼인한다’라고 나온다. 산화비괘(山火賁卦䷕) 육사(六四)에 ‘꾸미거나 희게 하여 흰 말이 나는 듯이 달려오니 도적이 아니라 혼인할 짝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화택규괘(火澤睽卦䷥) 상구(上九)에는 ‘어긋나 외로워서 돼지가 진흙을 뒤집어쓰거나 귀신을 실은 수레를 보니 먼저는 활을 당기다기 뒤에는 활을 벗어 놓는다. 적이 아니라 혼인할 짝이니 가서 비를 만나면 길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왜 도적과 혼인할 짝이 붙어 있을까? 청혼하고 싶은 처자가 있는 마을에 말을 타고 쳐들어갈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도적인 줄 알고 활 시위를 당기다가 청혼하러 온 것을 알고 의심을 풀고 화합할 수 있다. 아니면 도적이 쳐들왔는데 마을의 아름다운 규수와 혼인을 맺게 하여 평화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도 남자가 여자에 사랑의 감정을 처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돌진(dash)’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옛날에 말을 타고 쳐들어갔다면, 요즘은 스포츠카를 몰고 쳐들어가는 격이다.
연애나 혼인에서 ‘맨 처음 고백’은 쉽지 않다. 쳐들어가서 마음을 뺏으려는 공격성이나 저돌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칫하면 성추행범으로 몰릴 수 있다.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지, 호의가 있는지, 좀 반했는지, 마음을 뺏겼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는지를 보고 돌진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생각하고 재다가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홀딱 빠졌다느니 홀렸다느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을 훔쳤다는 말도 과언(過言)이 아닌 듯하다. 어떤 사람의 매력에 반해 그 사람에게 빠지면 그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 마음이 없어진 듯 할 때가 있다. 남녀가 사랑하면, 혼인을 하면 빼앗는 게 많을까, 빼앗기는 게 많을까. 남녀 모두가 서로 빼앗기만 해서 풍족해질까.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에서 ‘상호의존적인 약점이 있을 때 사랑은 성립된다’고 말한다. 또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상대가 필요한 사람은 대등하게 약하지 않으며, 전자는 내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만, 후자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것’이라고 말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내가 되거나, 상대의 필요성을 자극하는 내가 되는 것도 사랑의 전략이 되겠다. 필요가 없는 데도 사람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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